영화 ‘암살자들’ 이념 전쟁?…문세광 총성이 바꾼 한국 스포츠 50년 [유병철의 스포츠 렉시오]


사건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두 사람
박종규 김운용, 현실 정치 떠나 스포츠 매진
세계사격선수권, 서울올림픽, 태권도세계화 등

영화 <암살자(들)>의 홍보 포스터. 알고 보면 이 영화가 다룬 문세광 사건은 한국의 스포츠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영화 한편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암살자(들)'이죠.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는 1974년 8월 15일 재일교포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및 육영수 영부인의 피살 사건(이하 문세광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고, 영화의 완성도 역시 높지만 ‘역사왜곡’이라는 거센 비판이 일면서 이념전쟁이 영화계는 물론, 정치권과 사회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대한민국에서는 어느 분야든 이념대립을 주입하면 폭발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 그런데 이 ‘문세광 사건’은 한국스포츠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세광 발(發) 한국스포츠의 대전환’을 이해하려면 두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1930~1985)입니다. 그는 5.16 군사정변의 주축으로 1964년 5월부터 문세광 사건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경호실장을 맡아왔죠. ‘피스톨 박’으로 불린 그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수가 틀리면 국회의원, 장관, 도지사 등의 정강이를 걷어찼죠. 육영수 여사의 부탁으로 청와대 사정담당 비서관이 자신의 뒤를 캔다는 소식에 박종규는 그 비서관 앞에서 엽총을 발사하며 위협했죠(이 사건 이후 대통령의 채홍사 일이 중앙정보부로 이관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또 한 도지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담뱃불을 붙이다 라이터 불꽃이 커져 각하를 놀라게 했다는 이유로 박종규에게 얻어맞았죠.

# 요즘 많이 회자되고 있는 문세광 사건의 현장영상에서 박종규는 첫 총성 이후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며 단상으로 뛰어나왔죠. 사격고수답지 않게 당황해서 권총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범했지만요. 정부 공식행사에서 영부인이 암살자의 총격에 쓰러졌으니 박종규는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만 했습니다. 그 후임이 바로 차지철(1934~1979)이었죠. 권력을 등에 업은 차지철의 횡포는 박종규 이상이었고, 이는 나중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시대의 종말로 귀결됐죠.

아주 유명한 사진.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당시 박정희 소장(가운데)을 보필하고 있는 박종규 소령(왼쪽)과 차지철 대위이다. / 국가기록원

# 두 번째 인물은 한국 스포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운용(1931~2017)입니다. 그는 4.19혁명(1960년) 직후 송요찬 내각수반의 부관, 장면 내각의 총리 의전비서관을 거쳐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죠. 그런데 김운용은 1974년 문세광 사건 당시 청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그것도 경호실 차장으로, 당일 상황실장을 맡았죠. 앞서 1968년, 그는 청와대의 대미담당 1급 비서관으로 알고 귀국했는데, 권력수뇌부의 의견불일치로 경호실보좌관(차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김운용 역시 문세광 사건의 후폭풍으로 사표를 내야했습니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임자는 그만둘 필요가 없는데"라고 말하면서도 사표를 수리했고, 거액의 전별금을 전했다고 합니다.

# 권력의 심장부에서 물러난 박종규와 (특히)김운용은 스포츠에 매진했습니다. 당시는 권력자들이 스포츠단체장을 겸직했는데, 문세광 사건 전에 이미 박종규는 대한사격연맹 총재(1970년), 김운용은 대한태권도협회장(1971년)을 맡았죠. 박종규는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이 대회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제스포츠이벤트로 전국에 사격장이 생기고, 고위공직자 사격대회가 열리는 등 큰 화제가 됐지요. 박종규는 1979년 2월 대한체육회장이 되고, 서울올림픽 유치에도 나섰습니다. 신군부 등장 이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정계에서 은퇴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의 승인하에 198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선출됐습니다. 1973년 윤필용 사건 때 박종규가 그를 구해준 것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많았습니다.

1960년대 김운용(맨 오른쪽)이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던 시절, 박종규 경호실장(왼쪽에서 두번째)과 미국 경호국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는 장면. 김운용은 회고록에서 1969년 닉슨 대통령 취임식 때 박종규 경호실장과 함께 10만 달러짜리 방탄특수유리 연설대를 보고 예산이 없어 도입은 못하고, 대신 연설대에 철판을 깔았다. 이것이 문세광 저격 때 박 대통령을 살렸다.고 술회했다. / 김운용 제공

# 스포츠계 활동은 김운용이 더 화려했습니다. 아예 한국 스포츠 역사를 바꿔놨습니다. 1981년 서울 올림픽 유치 때 최일선에서 활약했고, 이후 뛰어난 외국어실력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국제스포츠계의 거물로 성장했습니다. 1985년 박종규가 갑자기 병사하자 바통을 이어받아 IOC위원이 됐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조직위원회의 부위원장을 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후 월드게임 초대회장, GAISF 회장, IOC 수석부위원장 등 국제무대에서 승승장구했죠. 가장 큰 업적은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종목 등 전 세계인의 스포츠로 만든 겁니다. 한때 대한태권도협회장, 국기원장,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대한체육회장, IOC위원, 국회의원 등을 동시에 수행했죠. 비서만 19명이었고, 국내는 물론이고, IOC위원장에 도전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컸습니다. 2005년 그가 부정부패로 사법처리를 받을 때까지 한국 스포츠는 ‘김운용의 시대’였습니다.

# ‘문세광 사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현실정치에 바쁜 박종규, 김운용은 스포츠에 전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서울 올림픽만 해도 이 두 사람의 ‘청와대 사표’가 없었다면 유치 자체가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을 세계로 알린 서울 올림픽은 정통성이 결여된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정책 중 하나로 폄훼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1987년 민주화에도 긍정적인 작용을 했습니다. 1년 뒤 올림픽 때문이라도 군사정권이 국민적 저항을 짓밟을 수 없었던 것이죠. 또 태권도가 지금처럼 올림픽 종목으로 전 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가 되었을까요? 당연히 '동방불패'로 불리던 한국 스포츠의 김운용 시대도 없었을 겁니다. 굳이 역사에 가정을 붙이지 않아도 문세광 사건이 박종규, 김운용 두 사람을 통해 한국스포츠에 변곡점을 만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새삼 현실정치와 스포츠의 함수관계가 흥미롭습니다.

김운용 전 IOC수석부위원장. / 대한체육회 스포츠영웅 김운용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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