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강일홍 기자]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에게는 특별한 책임이 따릅니다. 특히 수십 년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레전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의 무게가 신인과 다르고, 후배와 동료에게 미치는 파장 역시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수 심수봉이 그 무게를 스스로 내던졌습니다. 심수봉은 추석 연휴 직전 있었던 전북 진안군의 '진안고원 트로트페스티벌' 무대에서 후배 가수 김다현을 공개 언급하며 쏟아낸 발언으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으면서 연휴 기간 내내 관심인물로 회자됐습니다. 김다현의 무대 직후 다음 순서로 오른 심수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제 머리를 이렇게 어지럽게 만들었어요. 젊은 아가씨가 노래가 뭔지 삶이 뭔지도 모르는 아가씨인거 같아요. 제 앞에 저저 선수 선수라, 저저 선수 선수라고 내보내지 말아주세요, 앞으로. 노래라는거 이렇게 함부로 하는게 아니야(같은 말 두번 반복). 인생 경험도 해보고, 고생도 해보고, 이렇게 찾아오신 모든 분들을 위로해주는 그런 음악은 그렇게 쉬운게 아니에요."
문제는 단순한 음악적 호불호가 아니라는 건데요. 선배 가수가 후배의 창법이나 음악적 방향에 이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러나 공개된 축제 무대에서,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도 자신보다 무려 54세 어린 후배를 사실상 지목해 공개적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 이름 대신 '여자애', '아가씨', '선수' 표현, 상대방 비하 행태
더욱이 '여자애', '아가씨', '선수'라는 표현으로 이름조차 무시해버린 것은 상대를 철저히 비하하는 행태로 보였고, 가수로서의 존재는 물론 한 사람의 인격체마저 아예 지워버리는 인상까지 남겼습니다. 음악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사람에 대한 공개적인 면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대중이 이미 잘 알듯이 김다현은 단순히 이제 막 무대에 올라온 신인이 아닙니다. MBN '보이스트롯' 준우승을 비롯해 TV조선 '미스트롯2', MBN '현역가왕'에서 최 상위권 성적을 거두며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가수입니다. 아직 10대이지만 이미 상당한 팬덤을 확보하고 활동 기반을 만들어온 인물이란 겁니다.
그런 가수에게 "노래를 함부로 하는게 아니다"는 취지의 말을 공개석상에서 던지는 것이 과연 선배의 조언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음악적 기준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일까요. 중요한 것은 심수봉의 음악관에 동의하느냐가 아닙니다. 음악적 견해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만 음악에 대한 비판과 사람을 공개적으로 깎아내리는 행위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습니다.
비판 여론이 빗발치자 심수봉은 결국 공식 사과문을 내야했습니다. 자신의 실언에 대해 "모두가 웃고 즐겨야 할 트로트 축제 현장에서 적절치 않은 순간에 상식을 벗어난 말을 뱉은 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행사 당일 소음으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 공개적인 비난, 박수갈채 받는 젊은 가수에 대한 속 좁은 속내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 않습니다. '스트레스'가 그런 말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은 순간부터 그 말은 개인의 혼잣말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듣고, 촬영하고, 온라인으로 공유하는 공개적인 발언입니다. 특히 상대가 17세 후배 가수라면 더욱 신중했어야 합니다.
심수봉은 자신의 사과문에서 스스로 '상식을 벗어난 말'이라고 인정했는데요. 상식의 문제, 과연무엇이 잘못된 걸까요. 사실상 심수봉 자신의 표현 안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심수봉의 음악적 기준에서 김다현의 무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공개된 자리에서 인격을 함께 재단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후배에게 조언하고 싶었다면 무대 뒤에서 조용히 이야기할 수도 있고, 음악적 견해가 달랐다면 그것을 자신의 음악으로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대중 앞에서 특정 후배를 지목해 "앞으로 내 앞에 내보내지 말라"고 말하는 방식은 조언이라기보다 공개적인 압박, 박수갈채를 받는 젊은 가수에 대한 속 좁은 속내로 비칠 수밖에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가수 한 사람의 감정적인 발언이 순식간에 온라인을 달구면서 정작 축제를 준비한 진안군과 관계자들까지 논란의 한복판에 서게 됐습니다. 출연 가수를 섭외하고 무대를 마련한 지역 관계자 입장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축제장을 찾은 관객들에게도 볼썽사나운 장면으로 기억될 수 밖에 없습니다.
◆ 50년 가까이 무대에 선 레전드라면, 실수의 무게감 역시 달라야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당사자인 김다현이 아직 10대라는 사실입니다. 17살 소녀 가수에게 무대는 꿈이어야 합니다. 실수도 하고 성장도 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선배 가수로서 따뜻하게 감싸주고, 격려 위로해주기는 커녕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만들었습니다.
알고보면 심수봉 자신도 음악 인생이 순탄했던 사람은 아닙니다. 1979년 10·26 사건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찬 자리에 배석했던 이후 방송 활동에 큰 제약을 받았고, 오랜 공백과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최근 방송에서도 "10·26 사건 이후 전혀 못 잡고 있다가 최근에 기타를 잡았다"고 털어놓을 만큼 오랫동안 음악 인생에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무례를 정당화해주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더욱 아쉽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상처는 깊고 소중하면서, 후배가 받을 상처는 가볍게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공감의 균형을 잃은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수봉은 "특정인을 망신 주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고 밝혔지만, 결과적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 책임까지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논란이 남긴 가장 씁쓸한 장면은 후배에게 '노래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했던 사람이 정작 자신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상처와 파장을 만들어낼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누구든 무대 위에서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만, 50년 가까이 무대에 선 레전드라면, 실수의 무게 는 달라야 합니다. 과연 사과 몇마디로 가볍게 끝날 일일까요. 이번 사태가 보여준 가장 아이러니한 자가당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