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꼭 20년 전(2006년)이었습니다. 그해 2월, 단일 이벤트로는 세계 최대의 흥행규모를 자랑하는 미식축구(NFL) 슈퍼볼에서 한국계 하인즈 워드가 팀(피츠버그 스틸러스) 우승을 이끌며 MVP로 선정이 됐죠. NFL이 최고 인기종목인 미국에서 화제가 된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워드와 그의 어머니 김영희 씨의 서사가 한 편의 영화 같았기 때문입니다. 주한미군 병사와 클럽가수의 사랑, 의정부에서 태어난 혼혈아들, 도미와 이혼, 투잡 스리잡을 하며 아들을 되찾고, 홀로 키워낸 과정, 이를 아는 아들의 지극한 효심까지 말입니다.
# ‘엄마의 눈물로 키워낸 슈퍼볼 영웅의 스토리’에 한국의 미디어는 관련 보도를 쏟아냈고, 지상파 방송은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했죠. 관련 단행본도 나왔고, 하인즈 워드는 한국에서 광고모델과 홍보대사를 맡을 정도로 화제만발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청와대 방문이었습니다. 하인즈 워드는 어머니와 함께 그해 4월 노무현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찾았고, 워드의 어머니 사랑을 경청한 ‘효의 나라’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적으면 그대로 교과서."라고요.
# 하인즈 워드가 ‘효도의 교과서’라면, 이번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는 ‘젊은이의 역경극복 교과서’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개회식 다음날인 9월 20일, 신생종목 테크볼에서 남자단식 금메달을 딴 이준석(27)입니다. 종목도 생경한데다가, 이준석도 세계랭킹이 391위로 기대주가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깜짝 금메달’이었습니다. 무명도 이런 무명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선수가 예선부터 결승까지 8전 전승에, 그것도 무실세트로 완벽우승을 달성했으니 큰 감동을 전했습니다. 같은 날 홈팀 일본을 2번이나 꺾으며 44년 만에 아시안게임 원정우승을 달성한 남자농구 쾌거와 함께 이번 대회 초반 한국의 아시안게임 열기를 한껏 띄우는 촉발제가 됐지요.
# 이준석의 서사는 하인즈 워드에 뒤지지 않습니다. 한국사회에서 2030세대의 고달픈 삶이 사회적 이슈가 된 지 오래인 까닭에 더욱 그렇습니다. 이준석은 축구선수(21세에 K4선수로 은퇴)였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족구로 전향해 신기의 수비능력(왼쪽 수비수)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종목 자체가 국제적으로는 뻗어나가기 힘들었기에 과감하게 테크볼로 전향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어머니에게 200만 원을 얻어 경기용 테이블을 구입했고, 처음에는 연습할 실내공간이 없어 관리실의 허락을 받아 아파트 공원에서 훈련했습니다. 비가 오면 훈련을 접어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죠. 그래도 이준석은 더 높은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국 유명선수들에게 SNS로 자문을 구하며 노력했습니다.
# 2026년 2월 테크볼이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확정되자, 이준석은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정규직을 눈앞에 둔 대기업 계약직이었는데, 과감하게 사표를 냈습니다. 자비로 헝가리 연수도 다녀왔습니다. 테크볼이 대한체육회 정가맹 단체가 아닌 까닭에 진천선수촌 입촌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어렵게 실내족구장을 빌렸고, 분식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훈련에 열중했습니다. 이준석을 포함해 테크볼 국가대표 선수단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선수가 없기에 십시일반으로 훈련비를 모아가며 이번 아시안게임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아시안게임 전 한 인터뷰에서 직업을 묻는 질문에 "무직입니다"라고 답한 이준석의 영상은 ‘성지’가 됐습니다.
# 이준석 쾌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포털사이트에서 테크볼과 이준석이 인기검색어로 등장하고, 위기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역전승을 일궈내는 이준석의 플레이는 크게 화제가 됐습니다. ‘찐 감동이다’, ‘테크볼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음’, ‘(이준석) 유퀴즈 출연권 획득’, ‘(마지막 금메달 포인트를 따자)취업확정샷이다’, ‘눈빛이 좋다ㄹㅇ(레알)’ 등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군면제(금메달로 병역혜택) 댓글이 나오자 ‘99년생으로 이미 군필’이라는 답글이 알아서 달리기도 했습니다. 우승이 확정된 순간 이준석은 관중석의 어머니를 발견하고 "나 금메달 땄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습니다. 어머니 윤순정 씨는 한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그냥 쟤(이준석)만 보면 눈물이 난다. 눈물 버튼이다."라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모두 보는 사람이 울컥해지는 순간들이었습니다.
# 대한체육회가 향후 테크볼 대표선수들의 진천선수촌 훈련을 허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한국에는 테크볼 실업팀이 없고, 이준석 등 테크볼 대표선수들은 여전히 무직입니다. 오로지 아시안게임만 보고 질주해온 까닭에 특별한 미래계획도 없습니다. 향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만 있을 뿐입니다. 최악의 경우, ‘원히트 원더’처럼 이번 쾌거가 빨리 잊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기관인 청와대가 하인즈 워드 때처럼 이준석을 초청했으면 합니다. 높은 인기와 고소득을 올리는 슈퍼스타는 빼더라도 이준석과 같은 감동의 선수들을 대통령이 꼭 격려했으면 합니다. 한국은 유독 젊은이들의 실패에 인색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어서 성공한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습니다. 이준석의 얘기를 그대로 받아적으면 '실패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젊음의 교과서'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