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정채영·이태훈 기자] 조희대 대법원장이 청와대의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 요청을 거부하면서 범여권에선 '2차 사법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게 논의의 골자인데, 개혁안의 세부 내용을 두고 범여권 내에서도 이견이 감지되면서 2차 사법개혁이 실제 추진될 수 있을진 미지수다.
23일 정치권에 따르면, '재제청 거부 사태'를 둘러싼 청와대와 대법원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국가 운영의 컨트롤타워인 청와대와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원이 연이틀 특정 사안을 두고 정면충돌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지난 1월 시작된 청와대와 대법원의 대법관 인선 신경전이었다. 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1월 말 김민기·박순영 서울고법 고법판사와 윤성식 서울고법 부장판사,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 등 4명을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대법원이 최종 후보를 추리는 데 합의하지 못했고, 지난 3월 퇴임한 노 전 대법관 후임 자리는 6개월 넘게 공석인 상황이다.
이에 조 대법원장은 대통령과 합의를 마친 뒤 제청하는 관행을 깨고 지난달 18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손봉기 후보자를 임명 제청하는 초강수를 뒀다. 당시 조 대법원장은 대통령을 직접 만나 제청하는 관행도 '서면 제청'으로 깨면서 더욱 논란이 됐다. 그러자 청와대는 "절차적 완결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며 손 후보자 건을 반려하고 재제청을 요청했고, 여기에 조 대법원장이 '재제청 거부'로 맞서면서 현재의 국면을 맞게 됐다.
전날 조 대법원장이 언급한 재제청 거부 논리를 두고 맞섰던 청와대와 대법원은 이날도 대치를 이어갔다. 조 대법원장은 전날 "청와대의 8월 28일 자 재제청 요청 관련 문서에는 재제청을 요청하는 구체적인 사유와 그 헌법적 근거가 적혀있지 않고, 달리 재제청 요청을 정당화할 구체적인 헌법적 근거와 사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재제청 요청에 응할 수 없다"고 재제청 거부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청와대는 "대법원장의 입장 발표는 대법원장의 제청권이 대통령의 임명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으로 대한민국 헌법에 위배되는 인식"이라며 "반려의 헌법적 근거는 공문에서 분명히 밝혔고, 구체적 사유는 수석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국민들께 소상히 말씀드렸다"고 반박했다.
조 대법원장은 이같은 청와대 반박에 이날 "재제청 요청의 사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기재돼 있지 않다"며 "공문의 문헌상 명확한 근거와 사유가 제시돼야 그 효력에 다툼이 없고 헌법과 법률에 따른 절차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재차 반박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공문상 누가 보더라도 대통령의 임명 거부 입장이 명백히 드러나 있는데, (조 대법원장은) 재제청 요청의 사유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호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와 대법원의 대치 국면이 점입가경 양상을 보이면서 국회의 움직임도 분주해지고 있다. 특히 입법 주도권을 쥔 범여권을 중심으로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손보기 위한 2차 사법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시대 정신과 상황에 대한 무지와 착각에서 시작된 '희대의 난'은 사법개혁의 방아쇠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서 민주당은 올해 초 이른바 '4심제'인 △재판소원제 △법을 왜곡해 적용한 법관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왜곡죄 △대법관 26명 증원법 등 1차 사법개혁을 단행한 바 있다.
정치권에선 2차 사법개혁 추진이 현실화할 경우, 그 핵심은 '법원행정처 폐지'가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현재 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 지휘 아래 전국 법원의 조직·인사·예산 등 사법행정 사무를 총괄하고 있다. 법원행정처장은 대법관 가운데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사법행정 관련 주요 사항은 별도의 합의제 기구에서 결정하게 하고, 법원에는 집행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처만 둬서 대법원장 권한을 분산하자'는 것이 법원행정처 폐지론자들의 주장이다.
다만 2차 사법개혁 논의가 본격화하더라도 실제로 법원행정처 폐지가 이뤄질 수 있을진 예단하기 어렵다. 조국혁신당 등 민주당보다 선명한 진보 색채를 지닌 정당들과 실제 입법의 열쇠를 쥔 민주당 사이의 온도차가 감지되면서다.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취임 후 조 대법원장을 향한 강경 메시지를 내오고 있지만, 법원행정처 폐지에 대해선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게 내부 전언이다. 민주당 소속 서영교 국회 법제사법위원장도 지난 22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법원행정처 폐지와 같은 사법개혁 필요성이 더 커진 것이냐'는 질문에 "바로 그렇게 갈 내용은 아니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다시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며 즉답을 피했다.
반면 혁신당은 법원행정처 폐지로 미완의 사법개혁을 완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박병언 혁신당 대변인은 "사법개혁은 제왕적 대법원장을 보좌하고 있는 법원행정처 폐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이번 대법원장의 제청권에 대한 입장 발표 역시 법원행정처 심의관들의 문서에 기반해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법원행정처 폐지 등 강력한 사법개혁 드라이브에 다소 거리를 두는 데는 현재의 정국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통화에서 "중대범죄수사청장 인선 등 검찰개혁 후속 조치를 두고도 아직까지 말이 나오는 상황에서 법원행정처 폐지와 같은 거대한 사법개혁을 동시에 추진하기엔 당 지도부도 부담일 것"이라며 "사법부를 박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 하락 추세인 지지율에 더 큰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