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강일홍 기자] 배우 손예진이 24년 만에 사극으로 돌아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스캔들’을 통해서다. 2002년 영화 ‘취화선’ 이후 오랜만에 사극 장르에 도전한 손예진은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자신의 욕망과 재능을 감추지 않는 조씨부인으로 변신했다. 지난 주말 공개돼 글로벌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이 작품은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를 조선시대로 옮긴 이야기다.
데뷔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손예진의 이름에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대중에게는 한때 반짝하고 사라지는 스타가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존재감이 단단해지는 배우로 각인돼 있다. 여고생 시절 CF로 얼굴을 알린 뒤 드라마 '맛있는 청혼'을 시작으로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사랑의 불시착' 등 숱한 작품을 거치며 자신의 영역을 차근차근 넓혀왔다.
손예진의 롱런에는 몇 가지 분명한 키워드가 있다. 첫 번째는 '구설보다 작품으로 말하는 이미지'다. 연예계에서 스타의 인기는 작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사생활, 인간관계, 말 한마디까지 대중의 관심사가 된다. 특히 여성 톱스타에게는 작품 외적인 이미지가 커리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손예진은 오랜 활동 기간 동안 대중에게 비교적 안정적이고 단정한 배우 이미지를 구축해왔다.
유명인에게 '스캔들이 전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지만, 손예진의 이름이 대중에게 각인된 방식은 사생활 이슈보다 작품과 연기, 그리고 캐릭터를 통해서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멜로 여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지만 그것만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가두지도 않았다. '협상'에서는 냉철한 협상가를, '덕혜옹주'에서는 역사적 인물을, '비밀은 없다'에서는 모성의 불안을, ‘해적’에서는 액션 캐릭터를 소화했다.
◆ 공백이 곧 '기다림'...가장 얻기 어려운 배우 자산 '희소성' 가치
두 번째는 '작품을 고르는 시간'이다. 손예진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작품 수를 무작정 늘리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일정한 공백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이 연기적으로 보여줄 것이 있는 작품을 선택해왔다. 2013년 '상어' 이후 5년 만에 드라마로 돌아온 작품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였고, '사랑의 불시착' 이후에도 긴 시간을 두고 다음 작품을 선택했다. 2025년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 없다'로 7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 손예진은 작품 속 자신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절제된 인물이었음에도 캐릭터의 현실성과 개연성을 놓고 감독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눴다고 밝혔다. 스타에게 작품 공백은 위험할 수 있다. 대중의 기억에서 잊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예진에게는 이상하게도 공백이 곧 '기다림'으로 바뀐다. 이게 바로 배우에게 가장 얻기 어려운 자산 가운데 하나인 희소성이다.
세 번째는 '처음 인연을 오래 가져가는 뚝심'이다. 손예진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속사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 김민숙 대표와의 오랜 인연이다. 손예진은 데뷔 당시부터 현재 소속사와 변함없는 의리를 지켰고, 스스로도 여러 인터뷰에서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한번 맺은 인연을 작은 이해관계로 쉽게 바꾸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연예계에서는 스타가 뜨면 주변 환경도 달라진다. 더 큰 회사, 더 많은 조건, 더 화려한 제안이 쏟아진다. 그런 상황에서 데뷔 때부터 함께한 매니지먼트와 장기간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 의리'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안에 주변에서는 알 수 없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뢰가 오랜 시간 동안 쌓여왔다는 사실 자체가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또 다른 자산이다.
◆ 인생의 변화에 따라 속도 조절...쉬어야 할 땐 쉬고 작품으로 복귀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이미지에 갇히지 않는 변화'다. 손예진 하면 멜로가 먼저 떠오르지만 정작 그의 경력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색깔로 설명하기 어렵다. '클래식'과 '내 머리 속의 지우개'로 멜로의 대표 배우가 된 뒤에도 스릴러와 액션, 시대극, 코미디를 오갔다. 최근 '어쩔수가 없다'에서는 절제된 생활 연기를 보여줬고, 이번 '스캔들'에서는 욕망과 전략을 품은 조씨부인으로 변신했다.
정지우 감독이 손예진을 두고 "이야기를 어깨에 얹고 캐릭터를 믿게 만들어 전체 드라마를 책임지는 배우"라고 평가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번 역할은 배우 손예진에게도 새로운 시험대다. 겉으로는 정숙한 여인이지만 내면에는 욕망과 야망이 꿈틀거리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손예진 역시 제작발표회에서 "이제는 그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아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는 '삶과 연기의 균형'이다. 현빈과 결혼하고 출산한 뒤에도 손예진은 자신의 배우 인생을 서두르지 않았다. 약 3년간 육아에 집중한 뒤 2025년 '어쩔수가 없다'로 복귀했고, 그 다음 행보가 24년 만의 사극 '스캔들'이다. 중요한 것은 '결혼과 출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식의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손예진은 인생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속도를 조절했다. 쉬어야 할 때 쉬었고, 돌아올 때는 작품으로 돌아왔다.
◆ 화려하게 타오르는 별보다 오래 빛나는 별, '진짜 사랑받는 배우'
손예진의 진짜 힘은 어쩌면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스타가 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스타가 된 뒤에도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는 것은 더 어렵다. 유행하는 장르를 따라가기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을 기다리고, 이름값에 기대기보다 캐릭터를 선택하고, 처음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과의 인연을 오래 이어가며, 결혼과 출산이라는 삶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손예진의 오랜 연예계 행보는 '관리된 이미지'라는 말만으로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어쩌면 그것은 꾸준함과 선택, 관계와 자기 절제의 결과에 가깝다. 이번 사극 복귀가 더 눈길을 끄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2002년 '취화선'의 손예진과 2026년 '스캔들'의 손예진 사이에는 24년이라는 시간이 놓여 있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존재감은 오히려 더 커졌다.
풋풋한 신인에서 '멜로퀸'을 거쳐 국민적 스타로,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연기할 수 있는 원숙한 배우로 모습을 바꿨다.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긴 시간을 거치며 달라졌지만 한 가지는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래 사랑받는 배우'라는 점이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별보다 오래 반짝이는 별이 더 강하다. 손예진의 오늘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래서 더 밝게 빛나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