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든 '빅이어', 이번엔 주연...이강인의 '진짜 챔스' [박순규의 창]


PSG서 UCL 2연패했지만 결정적 순간엔 벤치…알레띠 이적 후 라리가 4경기 연속 출전
10일 안필드서 리버풀과 2026~27 UCL 첫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이강인(오른쪽)은 10일 오전 4시 영국 리버풀의 안필드에서 리버풀과 2026~27 UCL 리그 페이즈 1차전 출격을 시작으로 별들의 전쟁에 참전한다. 사진은 20일 말라가와 2026~2027 라리가 1라운드 홈 개막전에서 후반 선제골로 데뷔골을 장식하며 기뻐하는 장면./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더팩트 | 박순규 기자] 같은 우승컵이라도 무게는 다를 수 있다. 들어 올린 트로피의 크기가 달라서가 아니다. 그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고, 얼마나 많은 순간을 책임졌느냐에 따라 기억의 무게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럽 축구의 최상위 제전인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가 다시 막을 올린다.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이 무대에서 이번 시즌 유독 한국 축구 팬들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이름은 단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이강인(25)이다.

10일 오전 4시(한국시간), 축구의 성지라 불리는 영국 리버풀 안필드에서 펼쳐지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리버풀의 리그 페이즈 1차전은 이강인 개인에게도 축구 인생의 거대한 변곡점이 될 승부다.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PSG) 시절 이강인은 두 차례나 '빅이어(챔피언스리그 우승컵)'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화려한 우승 트로피의 광채 이면에는 삼키기 힘든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토너먼트의 가장 뜨거운 순간, 정작 결승전과 승부처에서는 그라운드가 아닌 벤치를 지켜야 했던 까닭이다. '우승 멤버'였으나 완벽한 '주연'은 아니었던 셈이다

우승의 역사에는 이름을 새겼지만, 그 역사를 자신의 발로 써 내려간 주인공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영국 리버풀의 안필드는 이강인에게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니폼을 입고 처음 맞는 챔피언스리그. 상대는 리버풀이고 장소는 세계 축구에서 가장 뜨거운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안필드다. 아틀레티코 구단도 9일 오후 9시(현지시간) 리버풀전을 2026~2027시즌 UCL의 출발점으로 공식 예고했다. 이강인에게는 어쩌면 이날부터가 ‘진짜 자신의 챔피언스리그’인지 모른다.

개막전 원더골의 주인공 이강인(오른쪽)이 30일 세비야와 2026~27 라리가 3라운드 원정경기에서 전반 4분만에 바에나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뒤 포옹하고 있다./쿠팡플레이 중계화면 캡처

#‘유니폼 팔러 왔다’던 시선, 한 경기 만에 뒤집었다

지난 여름 이강인이 PSG를 떠나 아틀레티코로 향했을 때 현지의 시선이 모두 기대에 찼던 것은 아니다.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상업적 영입 아니냐는 의구심도 있었다. 실제로 스페인 스포츠지 '아스'의 아틀레티코 담당 기자는 이강인의 라리가 데뷔전이 끝난 뒤 "많은 사람이 이강인의 영입을 유니폼 판매를 위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하지만 이어진 문장은 전혀 달랐다.

"그는 엄청난 클래스의 선수다."

말라가와의 개막전이 의심을 기대감으로 바꿨다. 교체 투입된 이강인은 경기 흐름을 바꿨고 강렬한 왼발로 결승골까지 터뜨렸다. 아스는 아예 "훌리안, 이강인을 보고 배워라"는 제목의 칼럼까지 내놓았다. 단순한 마케팅 영입이라는 일부의 선입견에 경기력으로 답했다.

며칠 뒤 아스는 다시 이강인을 조명했다. "아틀레티코를 위해 웃는 이강인"이라는 제목 아래 그가 구단 프로젝트에 강하게 헌신하고 있으며, 이제 라커룸을 사로잡은 데 이어 팬들의 마음까지 얻으려 한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이강인이 개인보다 팀의 승리를 앞세우는 선수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 변화가 중요하다.

이강인은 아틀레티코에 온 뒤 라리가 4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개막전에서는 골을 넣었다. 세비야전에서는 전반 4분 만에 알렉스 바에나의 골을 도우며 시즌 첫 도움을 기록했다. 빌바오전에서는 공격포인트는 없었지만 전반 3분 오른발 슛으로 골대를 때렸다. 아스 역시 당시 이 장면을 아틀레티코가 골문을 위협한 대표적인 기회로 꼽았다.

4경기 1골 1도움. 숫자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더 중요한 변화는 숫자 밖에 있다. PSG에서 이강인의 가장 큰 숙제는 ‘잘하느냐’가 아니라 ‘계속 뛰느냐’였다. 아틀레티코에서는 시즌 초반부터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 선택지 안에 꾸준히 들어가고 있다.

교체 카드에서 선발로, 가능성에서 활용 가치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PSG의 조연에서 알레띠의 주연으로 빅이어 쟁탈전에 참여하는 이강인./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메오네가 이강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쁜 축구’가 아니다

아틀레티코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PSG와 다르다. 시메오네의 축구에서 기술은 출발점일 뿐이다. 공을 잃었을 때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지, 압박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가담하는지, 상대가 공을 잡았을 때 자신의 위치를 얼마나 책임지는지가 중요하다.

이강인이 가진 왼발의 정교함과 패스 능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4경기가 의미 있다. 이강인은 중앙과 측면, 때로는 공격수 가까운 위치를 오가면서 공격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했다. 공을 소유하는 플레이뿐 아니라 공이 없을 때 움직임과 수비 가담까지 시메오네가 요구하는 축구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리버풀전에서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대목이다. 안필드에서는 공을 예쁘게 다루는 것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 리버풀의 강한 압박을 등지고 공을 받을 수 있는가. 압박을 한두 번의 터치와 패스로 벗겨낼 수 있는가. 공을 빼앗겼을 때 즉시 수비로 전환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렵게 찾아온 한 번의 기회를 결정적인 패스나 슈팅으로 연결할 수 있는가.

안필드는 기술자의 재능보다 기술자의 용기를 시험하는 무대다.

#리버풀전에서 봐야 할 세 가지

첫 번째는 압박 탈출이다. 이강인의 가장 큰 장점 가운데 하나는 좁은 공간에서도 공을 지키며 방향을 전환하는 능력이다. 리버풀이 강한 전방 압박을 가한다면 이강인이 중원과 공격진 사이에서 압박의 첫 선을 벗겨내느냐가 아틀레티코 공격의 속도를 결정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전진패스의 목적지다. 아틀레티코에는 훌리안 알바레스와 바에나를 비롯해 순간적으로 상대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 수 있는 공격 자원이 있다. 이강인이 공을 오래 갖는 것보다 이들의 움직임을 얼마나 빨리 읽고 공을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세 번째가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 수비다. 챔피언스리그 원정, 그것도 안필드에서는 90분 내내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경기할 수 없다. 아틀레티코가 내려앉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이강인이 수비 블록의 한 부분으로 얼마나 충실하게 움직이느냐는 공격포인트 못지않게 시메오네의 신뢰를 좌우할 수 있다.

골이나 도움 하나가 이강인의 밤을 화려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시메오네의 선수로 챔피언스리그를 계속 뛰게 만드는 것은 공이 없는 시간의 80분일 수도 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왼쪽)과 새롭게 호흡을 맞춰 UCL 새 시즌에 돌입하는 이강인./더팩트 DB

#안필드는 아틀레티코에도 특별하다

아틀레티코에도 안필드는 낯설지 않다. 2019~2020시즌 UCL 16강 2차전에서는 마르코스 요렌테의 두 골과 알바로 모라타의 골로 연장 끝에 리버풀을 꺾는 명승부를 만들었다. 지난 시즌에도 두 팀은 안필드에서 만나 리버풀이 3-2로 이겼다.

아틀레티코 구단이 밝힌 리버풀과의 역대 공식전 성적은 3승2무4패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아틀레티코는 직전 빌바오 원정에서 0-3으로 완패했다. 아스는 당시 팀이 후반 시작과 함께 집중력을 잃었고 ‘연결과 아이디어가 부족했다’고 혹평했다. 시메오네 역시 경기 뒤 코칭스태프가 후반전에 필요한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인정했다.

팬들의 기대도 그래서 복합적이다. 이강인 영입 당시 온라인 축구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기술과 왼발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시메오네 체제에서 수비 부담을 얼마나 견뎌낼지, PSG 때보다 충분한 출전시간을 얻을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반대로 스페인 축구의 템포와 이강인의 기술적 특성이 잘 맞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시즌 첫 4경기는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이었다. 하지만 안필드는 난도가 다르다.

2024~2025 UCL 우승을 차지한 PSG의 이강인(앞줄 왼쪽 세 번째))이 동료들과 함께 시상대에서 빅이어를 높이 들며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UEFA

#두 개의 빅이어보다 중요한 ‘한 경기’

스물다섯 살의 이강인은 이미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을 두 개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선수에게 트로피는 소유하는 물건인 동시에 자신이 남긴 시간의 기록이다. 그래서 선수들은 벤치에서 들어 올린 우승컵보다 자신이 뛰어 얻은 한 번의 승리를 더 오래 기억하기도 한다.

PSG 시절 이강인은 유럽 정상에 오르는 법을 경험했다. 이제 아틀레티코에서는 정상으로 가는 길을 직접 걸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2027년 6월 6일 아틀레티코의 홈구장인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열린다. 아틀레티코가 꿈꾸는 마지막 장면이 자신들의 안방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그 긴 여정의 첫 페이지가 안필드다.

축구에서 성장은 더 많은 것을 갖는 과정만은 아니다. 때로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자신의 힘으로 다시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강인은 이미 두 번 유럽 정상에 섰다. 하지만 10일 새벽 안필드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목에 걸린 두 개의 우승 메달이 아니다.

리버풀의 압박을 벗겨내는 첫 번째 터치, 동료의 침투를 읽는 한 번의 왼발 패스, 공을 빼앗긴 뒤 되찾기 위해 달려가는 몇 걸음이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야 비로소 이강인의 세 번째 챔피언스리그가 이전의 두 번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두 번의 빅이어는 그의 경력에 이미 기록돼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우승컵이 아니라, 그 우승컵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이름을 선명하게 새기는 일이다. 안필드에서 이강인의 ‘진짜 챔피언스리그’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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