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용품 그만!”…러너들 ‘무료 라커’에 몸살 앓는 고궁박물관 [오승혁의 현장]


7일 국립고궁박물관 찾아
관람객 위한 물품보관함 78개, 러너들 사이 ‘꿀팁’으로 확산
개관 전·폐관 후 “짐 찾아야 한다"

7일 오승혁의 현장은 러너들의 장비 보관 자제를 요청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았다. 관람객들의 짐 보관을 위해 마련된 라커들 옆에 러너들의 사용 자제 요청 포스터가 붙어있다. /국립고궁박물관=오승혁 기자

[더팩트|국립고궁박물관=오승혁 기자] "박물관 물품보관소는 박물관 관람객을 위한 공간입니다. 러닝용품 보관은 삼가주세요."

7일 오전 ‘오승혁의 현장’은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인근에 자리한 국립고궁박물관을 찾았다. SK서린빌딩과 KT광화문빌딩을 비롯한 도심의 고층 건물,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서울청사 등을 지나면 북악산 자락을 배경으로 경복궁과 나란히 선 국립고궁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전 9시 30분 문을 연 박물관의 안내데스크 뒤편으로 들어서자 소형과 대형으로 구분된 물품보관함이 줄지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가방과 운동화 등이 놓인 그림과 함께 ‘러닝용품 그만!’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고궁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이곳에는 이른 시간부터 외국인 관광객과 가족 단위 관람객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과 백팩을 멘 관람객,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온 이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박물관이 운영하는 물품보관함은 모두 78개다. 여러 층에 걸쳐 마련된 전시실과 체험·교육 공간을 둘러보는 관람객이 가방이나 짐을 맡긴 뒤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설치된 편의시설이다.

그러나 현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물품보관함의 이용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복궁과 종로, 청계천, 서촌, 북악산 일대를 달리는 일부 러너들이 운동복과 신발 등 러닝용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하면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부터 댕댕런 등의 화제로 러너들의 짐 보관이 라커의 기존 설치 목적을 방해할 정도가 되어 자제 요청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립고궁박물관=오승혁 기자

러너들 사이에서는 국립고궁박물관 물품보관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정보가 일종의 ‘꿀팁’처럼 퍼졌다고 한다. 출근복이나 외출복 차림으로 박물관을 찾은 뒤 화장실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가방과 옷을 보관함에 넣은 채 달리러 나가는 방식이다. 러닝을 마치고 돌아와 화장실에서 땀을 닦거나 몸을 씻은 뒤 다시 옷을 갈아입는 사례도 이어졌다.

그 결과 정작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이 물품보관함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백팩이나 캐리어를 맡기려던 관람객이 빈 보관함을 찾지 못해 무거운 짐을 든 채 전시실을 둘러봐야 했다는 것이 현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문제는 박물관 운영시간 밖에도 이어졌다. 물품보관함 이용 시간은 박물관 입장 마감 시간과 같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다. 하지만 개관 전이나 폐관 후 "보관함에 짐을 두고 왔다"며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하거나 출입문을 두드리는 사례가 반복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안내와 방호 등을 담당하는 현장 직원들의 업무 부담도 커졌다. 관람객 안내와 시설 관리에 집중해야 할 직원들이 박물관 관람과 무관한 짐을 찾아주기 위해 추가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국립고궁박물관은 3일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현장 안내문을 통해 물품보관함의 관람 목적 외 이용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가가 운영하는 박물관이 특정 시설의 이용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협조를 당부한 것은 이례적이다.

7일 아침 국립고궁박물관의 외관. 평일 오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학생 단체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국립고궁박물관=오승혁 기자

박물관은 안내문에서 "무료 물품보관소는 전시 관람객의 편의와 쾌적한 관람을 위해 마련된 편의시설"이라며 "외부 운동 및 개인 용품을 장시간 보관해 정작 전시실을 찾은 관람객들이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지의 효과는 나타나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박물관 관계자들은 안내문이 온라인에서 확산한 이후 지난 주말에는 이전보다 러너들의 방문이 줄었다고 전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주변은 최근 러닝 명소로 떠오른 지역이다. 지도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달리면 강아지 모양이 완성되는 이른바 ‘댕댕런’ 코스가 알려졌고, 인근에는 러닝 관련 브랜드 매장들도 있다. 매장 앞이나 박물관 주변을 출발지로 삼아 달리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현장 관계자들에 따르면 저녁이나 주말에는 20~40명 규모의 러닝 크루들이 주변에 모이는 일도 있다. 참가자들의 앞뒤에는 전문 촬영 인력으로 보이는 이들이 따라붙어 사진과 영상을 찍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보행로를 차지하거나 통행을 방해해 퇴근길 시민과 주말 나들이객이 불편을 겪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다만 박물관은 러너들을 공격하거나 러닝 문화 자체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달리기가 건전한 여가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공공시설의 이용 목적과 주변 보행자의 통행권도 함께 존중해 달라는 취지다.

실제 이날 박물관 주변에서는 고궁을 관람하는 관광객과 산책을 나온 시민들이 쉼 없이 오갔다. 누군가에게는 달리기를 시작하는 편리한 장소일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여행 가방을 맡기고 조선 왕실과 대한 제국의 문화와 삶에 대해 살필 수 있는 꼭 필요한 공간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안내문은 단순히 ‘러닝용품을 보관하지 말라’는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빠르게 성장한 러닝 문화가 이제 함께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배려할 것인지 묻고 있다.

달리기는 길 위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그 길과 시설은 러너들만의 것이 아니다. 건강한 러닝 문화가 오래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록과 인증 사진보다 다른 이용자의 불편을 먼저 살피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sh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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