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순규 기자] 말은 쉽고, 증명은 어렵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에는 화려한 수사보다 행동이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실패를 겪은 조직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보다 무엇을 실제로 바꾸었는지가 신뢰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의 쓰라린 실패를 경험한 한국축구가 지금 그렇다. 수많은 진단과 반성, 쇄신의 언어가 쏟아졌다. 그러나 축구에서 마지막 문장은 언제나 잔디 위에 쓰인다. 전술도 철학도, 혁신도 결국 90분 안에서 증명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 축구대표팀의 임시 사령탑 로베르토 모레노(48·스페인)가 취임 후 처음 내놓은 메시지는 눈길을 끈다.
"결과를 약속드리지는 않겠다. 다만 노력과 정직, 그리고 존중을 약속드린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경기장에서 보여드리겠다."
대한축구협회가 지난 1일 선임한 모레노 감독은 오는 11월 27일까지 한국 대표팀을 이끈다. 9월과 10월 각각 두 경기, 11월 두 경기까지 모두 6차례 A매치가 예정돼 있다. 그 결과와 내용에 대한 평가에 따라 2027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까지 동행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말 그대로 ‘6경기의 시험’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우리는 그 6경기에서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
#승리만으로 평가한다면 또 같은 길을 걷는다
축구 감독에게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모순처럼 들린다. 프로와 국가대표의 세계에서 감독은 결국 승리로 평가받는다. 특히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충격을 경험한 한국축구에는 당장의 승리도 절실하다.
그렇다고 6경기의 승패만으로 모레노를 평가한다면 한국축구는 다시 익숙한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 평가의 첫 번째 기준은 ‘한국축구가 어떤 축구를 하려고 하는지가 보이는가’여야 한다.
볼을 소유할 것인지, 빠르게 전진할 것인지. 상대 진영에서부터 압박할 것인지, 중원에서 기다렸다 역습할 것인지. 손흥민과 이강인의 재능을 어디에서 극대화할 것인지, 김민재를 중심으로 한 수비라인을 얼마나 끌어올릴 것인지. 황인범과 이재성을 비롯한 미드필더들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
선수의 이름보다 먼저 원칙이 보여야 한다. 모레노는 흔히 스페인식 ‘점유율 축구’의 지도자로 분류된다. 루이스 엔리케와 함께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에서 일한 경력 때문이다. 그러나 점유율은 축구철학 그 자체가 아니다. 공을 오래 갖는 것이 목적이라면 축구는 숫자놀음에 머문다. 중요한 것은 왜 공을 소유하고, 그 소유를 통해 어디로 전진하느냐다.
소유는 목적이 아니라 공간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고, 패스는 기록을 쌓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상대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철학은 추상적인 문장이 아니라 반복되는 행동에서 드러난다.
#손흥민·이강인에게 ‘자유’ 아닌 ‘역할’을 줘야 한다
두 번째 평가 기준은 선수들의 역할이 명확해지는가다. 한국축구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보유하고도 대표팀에서는 그 장점을 하나의 체계로 묶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좋은 선수가 많다는 것과 좋은 팀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케스트라에 뛰어난 연주자만 모아놓는다고 좋은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박자를 잡고, 누군가는 선율을 이끌며,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소리를 낮춰 전체의 조화를 완성해야 한다.
축구도 다르지 않다. 손흥민에게 ‘마음껏 뛰라’는 자유만 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 가장 위협적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강인에게 공을 몰아주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어떤 공간에서 공을 잡게 해야 상대가 가장 흔들리는가를 설계해야 한다. 김민재의 수비력을 활용하는 것 역시 단순히 상대 공격수를 막게 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속도와 전진성을 이용해 팀 전체의 수비 위치를 결정하는 문제다.
좋은 감독은 스타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스타들의 재능 사이에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모레노의 6경기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도 바로 그 질서다.
#‘노력·정직·존중’이 경기장에서 보이는가
세 번째는 모레노 자신이 먼저 꺼낸 세 단어다. 노력, 정직, 존중. 감독 취임사로는 다소 소박하다. 우승도, 승리도, 화려한 목표도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한국축구에 가장 필요한 말일 수도 있다.
정직은 자신들의 수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상대보다 부족하다면 부족함을 인정하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존중은 상대뿐 아니라 선수와 팬, 그리고 축구 자체에 대한 태도다. 노력은 그 두 가지를 경기장에서 현실로 만드는 과정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는 말은 더디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고 했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증명하라는 의미다.
모레노가 "할 말이 있다면 경기장에서 보여주겠다"고 한 것은 이 오래된 문장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말도 검증의 대상이 된다.
경기에서 밀릴 때 선수들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대응하는가. 실점한 뒤 팀이 흔들리는가, 다시 자신의 축구를 되찾는가. 상대가 전술을 바꿨을 때 벤치는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가. 주전과 비주전의 역할은 명확한가. 어린 선수에게도 실력에 따른 기회가 주어지는가.
철학은 위기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6경기마다 ‘변화의 흔적’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대한축구협회 역시 이번에는 평가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에콰도르에 이겼으니 합격, 우루과이에 졌으니 실패라는 식의 단순한 성적표로는 부족하다.
6경기를 관통하는 객관적인 평가 지표가 필요하다. 후방 빌드업의 안정성, 상대 진영에서의 볼 탈취, 압박 시작 위치, 전진패스와 페널티박스 진입, 실점 후 대응, 세트피스 완성도 등을 경기마다 추적할 수 있다. 숫자로 잡히지 않는 부분도 있다. 선수들의 위치가 일관성을 갖는지, 공을 잃었을 때 팀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교체가 경기 흐름을 실제로 변화시키는지도 봐야 한다.
그래야 11월 27일 모레노와 계속 갈 것인지 판단할 때 적어도 ‘느낌’이 아니라 ‘근거’가 남는다. 감독 선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감독 평가 시스템이다. 좋은 감독을 데려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판별할 능력이 협회에 없다면 감독 교체는 결국 이름만 바꾸는 회전문이 된다.
한국축구가 월드컵 실패 이후 바꿔야 할 것은 감독 한 사람이 아니라 감독을 선택하고 지원하고 평가하는 방식까지여야 한다.
#6경기의 끝에서 묻고 싶은 한 가지
모레노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9월 24일 에콰도르전을 시작으로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11월 두 경기까지 단 6번의 A매치다. 대표팀 감독에게 6경기는 자신의 축구를 완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러나 방향을 보여주기에는 결코 짧지 않다. 나침반은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않는다. 다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알려준다. 지금 한국축구에 필요한 것도 완성된 정답보다 그런 나침반일지 모른다.
6경기에서 전승을 거두더라도 무엇을 하려는 팀인지 알 수 없다면 미래를 맡기기 어렵다. 반대로 몇 차례 패배하더라도 선수들의 역할이 선명해지고 경기마다 축구가 발전한다면 그 패배에는 다음을 기대할 근거가 남는다.
그래서 11월 모레노의 첫 임기가 끝나는 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히 "몇 승을 했는가"가 아니어야 한다.
"한국축구는 6경기 전보다 앞으로 나아갔는가."
모레노는 결과를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경기장에서 말하겠다고 했다. 이제 말은 끝났다. 그의 축구가 대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