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l 유병철 전문기자] # 시간이 좀 지났고, 그 사이 할리우드 대작 '오디세이',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에 밀리며 잊히고 있지만 나홍진 감독의 영화 '호프'는 분명 화제작이었습니다. 전문가는 물론 일반팬들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며 논쟁을 낳았죠. ‘빠’들은 3시간 내내 몰아치는 화려한 액션, 빼어난 영상미, 그리고 빠른 이야기 전개에 찬사를 보냅니다. 반면 ‘까’들은 도대체 영화의 장르가 무엇인지,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며 혹평합니다. 실제로 영화는 서부, 추격, 액션, 공포, 미스터리, 고어, 크리처, SF, 블랙코미디 등 온갖 요소를 버무려 놓았습니다. 로맨스를 빼고 다 넣은 느낌입니다. 포털사이트도 '호프'의 장르를 ‘SF, 스릴러, 액션’으로 다양하게 표기해 놓았습니다.
# 자세히 보면 '호프'에는 이전 영화들의 다양한 요소가 마치 오마주라도 하듯 숨어있습니다. 맨 처음 등장하는 외계인은 '진격의 거인', 후반에 나오는 고위층 외계인은 '프로메테우스', '에일리언', '프레데터', '아바타' 등을 떠올리게 합니다. 양배(음문석)의 작업실은 '블레이드 러너'의 세바스찬 집을 연상시키죠. 문화평론가인 이황석 한림대 교수는 한 칼럼에서 이런 '호프'에 대해 ‘혼성모방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이기에 (중략) 현대 텍스트론에 적합한 모델’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아주 적확한 지적입니다.
# ‘혼성모방기법(Pastiche 패스티시)’은 다른 작품의 양식, 내용을 목적의식 없이 모방해 새 작품을 만드는 기법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미학입니다. 원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하기에 오마주 성격을 띠며, ‘콜라주’ 방식과 일맥상통합니다. 풍자나 비판 의도가 없기에 패러디와는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1992년 이인화의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에 대해 표절의혹이 일었을 때 잠깐 유명해졌습니다.
제1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이 작폼에 대해 평론가 류철균이 ‘표절이 아니라 혼성모방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이라고 옹호하는 평론을 발표했죠. 그런데 이인화와 류철균이 동일인임이 알려지며 논란은 더욱 커졌고, 찬반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인화의 다음 작품인 '영원한 제국'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도 성공하면 이 혼성모방기법은 사나브로 잊혀졌습니다.
# 그런데 ‘무표정한 모방’으로 불리는 패스티시가 현대 스포츠에서 한창입니다. 기존의 여러 스포츠를 모방해 새로운 스포츠를 만드는 것이죠. 2026 아이치 나고야 아시안게임에 정식 정목으로 채택된 빠델, 테크볼, 버추얼 태권도도 혼성모방기법을 채용한 종목들입니다. 전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2,500만 명이 즐기는 것으로 알려진 빠델은 테니스와 스퀴시를 합쳤습니다. 2014년 헝가리에서 고안된 테크볼은 축구와 탁구를 결합했죠. VR 장비를 착용하고 가상공간에서 대결하는 버추얼 태권도는 복수의 종목을 합치지는 않았지만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역시 ‘혼성’의 성격을 띱니다.
# 이외에도 혼성모방 스포츠는 제법 많습니다. 미국, 호주, 동남아시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전 세계적으로 최근 5년 내 가장 성공한 스포츠’로 평가받는 피클볼은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을 섞었습니다. 미국 호주 등에서는 투어(개인), 리그(단체) 등 이미 프로화가 정착됐고, 폭발적인 성장세를 바탕으로 2032 올림픽 정식종목을 노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프로당구를 성공시킨 와우매니지먼트그룹이 전담팀을 꾸려 육성에 나섰습니다. 이밖에도 테니스와 배드민턴을 합친 '스피드민턴', 야구+소프트볼인 ‘티볼’, 게이트볼과 골프를 결합한 마레트골프 등이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이런 혼성모방 종목의 특징입니다. 바로 빼어난 접근성과 낮은 부상위험입니다. 재미와 운동량이라는 기존 스포츠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배우고’, ‘부상위험성을 크게 낮췄다’는 사실이죠. 생활체육으로 인기가 높은 탁구만 해도, 어느 정도 수준 있는 게임을 즐기려면 상당기간 레슨을 받는 등 나름의 진입장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골프나 테니스, 배드민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몸을 직접 부딪치는 종목은 물론, 네트 종목도 근골격계에 부담을 주는 동작이 많습니다. 새로운 종목들은 이런 문제들을 보완하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 피클볼을 예로 들까요? 와우 매니지먼트 그룹의 김영진 부사장은 "얼마 전 저희 회사 60명 정도의 직원이 모여 피클볼 대회를 치렀습니다. 모두 피클볼은 처음이었죠. 그런데 30분 동안 간단한 레슨을 받고 바로 대회에 출전해 게임을 즐겼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축구나 러닝이 생활체육으로 인기가 높은 것도 경기규칙이 단순하고 바로 게임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입니다. 단, 이 경우 부상위험이 높거나, 아기자기한 재미가 없다는 단점이 있죠. 이러니 혼성모방종목은 태생적으로 장점이 많습니다. 아직 대중성을 얻지 못했고, 영원히 그럴 수도 있다는 한계가 있을 뿐이죠. 기회는 늘 새로움 속에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스포츠의 변화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