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박지윤 기자] 배우들의 열연으로 완성된 네 모녀의 신선한 가족 복수극
오직 사적 복수에만 집중할 것 같았는데 그 안에는 생각보다 더 현실적이고도 뜨거운 가족애가 담겨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개 위에 감독의 영리함과 뚝심,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변요한의 열연이 더해져 재미와 메시지를 모두 잡은 '경주기행'이다.
오는 26일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 '경주기행'(감독 김미조)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막내딸을 위해 8년의 기다림 끝에 '죽이는' 여행을 떠난 네 모녀의 가족 복수극으로, 데뷔작 '갈매기'로 연출력을 인정받은 김미조 감독의 첫 상업영화다.
작품은 엄마 옥실(이정은 분)을 필두로 세 딸 장주(공효진 분) 영주(박소담 분) 동주(이연 분)가 8년 전 수학여행을 떠난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막내 경주의 생일을 맞아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고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낡은 노란 봉고차를 끌고 경주로 향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얼굴에 설렘이나 웃음기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평범한 가족여행처럼 보이는 이들의 여정에는 사실 숨겨진 비밀이 있다. 바로 봉고차 트렁크에 경주를 죽인 범인 백상현(변요한 분)이 꽁꽁 묶인 채 실려있는 것. 여행은 단지 알리바이에 불과하고 진짜 목적은 복수인 네 모녀의 죽이는 가족여행이 무사히 실행될 수 있을까.
지금껏 사적 복수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많았지만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긴장감이 가득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복수극과는 차원이 다른 '경주기행'이다. 차에 들어온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네 모녀가 겪어보지 않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족을 잃은 아픔을 품고 범인을 죽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을 하나의 소동극처럼 펼쳐낸다.
분명 계획과 알리바이는 머리는 타고난 둘째 영주의 손에서 치밀하게 세워졌으나 이를 실행하는 네 모녀의 어설픈 행동은 죽이는 여행에 번번이 엇박자를 내며 관객들에게 생각보다 더 많은 웃음을 안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단순히 범인을 죽이기 위한 네 모녀의 고군분투기 그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이를 넘어 동생의 사고 속에서 갖게 된 저마다의 아픔을 꺼내고 자신이 힘들다는 이유로 혹은 마주하기 무서워서 외면했던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고 진심으로 보듬게 되는 과정도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이야기 안에서 범인을 죽이고 복수에 성공하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데 집중하는 게 아닌, 상실의 아픔을 가슴 한편에 묻고 그럼에도 살아 나가야 하는 남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건네는 김미조 감독이다.
또한 김 감독은 실제로 언니 세 명이 있는 집의 막내인 만큼, 자매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관계성과 디테일한 설정들로 몰입도를 한껏 끌어올린다. 언니와 여동생이 있는 기자가 영주의 대사를 듣고 절로 고개를 끄덕였듯이 각자의 경험과 입장에 따라 더욱 마음이 가는 캐릭터가 생기는 점도 작품의 재미 포인트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출소한 범인을 납치해 사적 복수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다소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이야기가 현실에 발붙인 채로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다.
공효진은 사고 이후 오직 엄마만을 위하다가 결국 속내를 꺼내고 마는 K-장녀의 면모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자매들의 중심축이 된다. 박소담은 가장 개인주의 같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가족을 위해 되돌아가는 둘째, 이연은 '차라리 나였다면'이라는 죄책감을 과하게 높은 텐션으로 애써 덮어버리는 셋째의 내면을 안정적으로 표현하며 다채로운 케미를 완성한다.
노개런티로 힘을 보탠 변요한의 변신도 강렬하다. 더벅머리부터 덥수룩한 수염과 거친 피부에 치아 변색용 마우스피스를 착용하면서 파격적인 외적 비주얼을 완성한 그는 어떠한 일을 기점으로 눈을 갈아 끼우고 작품에 서늘한 긴장감을 제대로 불어넣으며 보는 이들의 분노를 유발한다.
그리고 이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건 이정은이다. 그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엄마의 얼굴을 보여준 그는 이번에도 또 다른 결의 엄마로서 관객들의 웃음과 눈물을 모두 책임진다.
자식을 잃은 엄마의 슬픔부터 범인을 마주한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까지, 대부분의 관객이 감히 헤아리기 어려운 감정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도 깊이 있는 열연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파격적이면서도 묘하게 납득하게 되는 강렬한 엔딩을 장식한 이정은의 얼굴은 근래 본 영화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렇게 배우들이 열연으로 빚어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신선한 가족 복수극인 '경주기행'은 15세 이상 관람가이며 러닝타임은 111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