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호엔 없던 '신뢰'...이청용 살린 윤정환의 축구 [이영규의 비욘더매치]


'상처'가 남은 자리에 피어난, 윤정환과 이청용의 ‘행복 축구’
‘홍명보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베테랑에 대한 신뢰와 공감

이청용(12)이 지난 5월 16일 광주FC전에서 PK로 득점을 올린 뒤 동료 외국인선수 페리어의 진심어린 축하를 받고 있다./K리그

[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감독님과 코칭스태프가 워낙 잘 관리해 주시니까요."

올해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축구 인생의 새로운 봄을 열어가고 있는 이청용의 미소에는 잔잔한 평온함이 감돈다. 서른여덟의 나이, 한여름 가마솥더위에 풀타임을 소화하는 데 체력적으로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답하는 그 나직한 목소리 속에는 수장에 대한 깊은 믿음과 존경이 배어 있었다. 무조건적인 신뢰,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공감. 불과 1년도 안 되는 시기, 울산 HD 시절 팀 내 차가운 불협화음과 거센 파문 속에서 커리어의 막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던 그 베테랑이 맞나 싶을 정도다.

이청용이 누리는 이 평온한 일상은, 불과 얼마 전 대한민국 축구가 마주해야 했던 가장 시리고 잔인한 계절과도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감독 선임 과정부터 수많은 잡음과 불신으로 얼룩졌던 홍명보호가 끝내 32강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세계 34위라는 부끄러운 숫자를 남긴 채, 날 선 비판이 가득한 공항으로 고개 숙여 귀국해야 했던 대표팀 최악의 잔혹사. 그 가운데에는 시스템의 부재와 전술적 표류 속에서 모든 무게를 홀로 짊어져야 했던 외로운 캡틴, 손흥민도 있었다. 그에게는 감독의 든든한 방패막이도, 명확한 전술적 교감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에이스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한 채 주먹구구식 리더십으로 파국을 자초한 홍명보호의 불행은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깊은 상흔으로 남았다.

그래서 월드컵 참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지금, 인천의 그라운드가 보여주는 풍경은 더욱 특별하고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곳에는 베테랑에게 과도한 기대만 얹어놓은 채 비바람을 홀로 맞아내게 두는 무책임함이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베테랑의 세월과 가치를 존중하고, 마모되지 않은 그의 천재성을 온전히 펼쳐 보일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따뜻한 리더십이 있을 뿐이다.

지난해 10월18일 울산HD 소속 이청용이 광주FC전 득점후 골프 스윙동작으로 하며 골뒤풀이를 하고 있다./K리그

사실 이청용의 인천 이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울산 HD 시절이던 지난해 10월 골프스윙 골뒤풀이 논란과 전임 신태용 감독과의 갈등 파문 속에서 그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팀 내 불협화음 속에서 선수들을 대신해 총대를 멘 행동이었으나 경솔했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결국 지난해 12월 말 울산과의 계약 연장마저 무산됐다. 베테랑의 은퇴까지 거론되던 위기의 순간, 손을 내밀어준 이가 바로 윤정환 감독이었다.

"불미스러운 일은 있었고 자칫 선수 생활에 치명적일 수도 있었지만, 인천에 와서 다 씻어낼 수 있도록 같이 한번 해보자."

윤 감독의 이 한마디는 비바람에 젖은 베테랑의 마음을 단숨에 녹였다. 실력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사람에 대한 조건 없는 포용. 이청용이 윤 감독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듯, 윤 감독 역시 이청용이라는 존재 자체에 아낌없는 믿음을 보낸다.

"이청용은 영리하게 공을 잘 차는 선수다. 우리가 요구하는 포지션과 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풀타임을 뛰며 체력적으로 걱정도 되지만 즐겁게 축구하는 게 느껴지고, 팀 전체의 퀄리티와 분위기를 올려주고 있다." 윤 감독의 말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전성기 시절의 이청용은 간결하고 날렵한 드리블과 짧고 안정적인 퍼스트 터치로 프리미어리그 볼턴 시절 ‘팀 내 최고 테크니션’이라는 찬사를 받던 천재였다. 큰 부상과 세월의 흐름을 거치며 역동적인 폭발력은 옅어졌을지언정, 특유의 센스와 시야, 그리고 축구 지능은 독일 보훔과 K리그를 거치며 한층 농익은 플레이메이킹 능력으로 진화했다.

이청용(가운데)이 지난 26일 열린 K리그1 인천-부천전에서 부천 여봉훈의 강한 견제에도 볼을 지켜내고 있다./K리그

2026년 인천의 짙푸른 유니폼을 입은 이청용은 측면 날개와 최전방 투톱을 넘나들며 피치 위를 우아하게 수놓고 있다. 명목상 최전방 ‘톱’의 자리에 찍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측면과 중앙, 공간과 공간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프리롤 공격형 미드필더다. 압박 속에서도 신비로울 만큼 안정적으로 공을 지켜내고, 정교한 패스와 전술적 움직임으로 인천 공격의 정교함을 더하고 있다.

"우리에겐 공을 쥐고 있을 때나 상대의 거센 견제가 들어올 때 볼을 키핑해주는 능력이 절실한데, 이청용은 그것을 너무나 쉽게 해낸다. 역시 노련함에서 나오는, 한 수 위의 축구를 보여준다." 윤 감독의 찬사는 단순히 말에 그치지 않는다.

서른여덟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이청용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롱런하며 지난 16일 부천전까지 올 시즌 K리그1 전 경기(20경기) 출전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4월 중순 조커 출전에서 시작해 선발 비중을 늘려가더니, 5월 16일 광주 FC전에선 1골 1도움으로 맹활약했고, 지난 12일 안양전에서는 무려 10.876km를 누비며 K리그1 17라운드 ‘베스트 러너’ 6위에 이름을 올려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투톱의 한축으로 풀타임을 소화하며 선보인 이 투혼은 인천 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인천 윤정환 감독이 지난21일 열린 K리그1 울산 HD와의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다./K리그

인천은 K리그1으로 복귀한 올 시즌, 리그가 거듭될수록 윤 감독이 다듬어온 후방 빌드업과 포지셔널 플레이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그라운드의 지배력을 넓혀가고 있다. 후반기 들어 K리그1의 강자 FC 서울과 안양을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잇따라 0-1 패배를 당해 자칫 조급해질 법도 했다.

하지만 윤 감독은 지친 선수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우리 다시 해보자"고 독려했고, 이청용은 윤 감독의 이런 인간적인 리더십에 깊이 매료됐다. 지난 18일 전북전에서 후반기 첫 승리를 거둔 후 "감독님과 코칭스태프가 부담 없이 편하게 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다. 그만큼 내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잘해야 한다" 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베테랑의 진심이 담겨 있다.

"경기에 이기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우리는 단 한 경기가 아니라 시즌 전체라는 긴 여정을 보고 있다. 매 경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올해 반드시 상위 스플릿에 남겠다는 뚜렷한 이정표를 바라보며, 매 순간 후회 없는 최선의 플레이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마치 잘 익은 와인처럼 깊은 향을 풍기는 베테랑의 품격, 그리고 그 가치를 묵묵히 지켜주는 수장의 따스한 신뢰. 선수가 가진 최고의 무기를 활용하지 못한 전술적 표류와 무거운 중압감 속에서 끝내 참패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홍명보호의 서글픈 결말과는 다르게, 2026년 인천 유나이티드의 그라운드 위에는 차가운 승패의 세계를 넘어선 축구의 가장 아름다운 낭만이 피어나고 있다. 수장과 베테랑이 서로를 품어줄 때, 축구는 비로소 상처 입은 이들의 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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