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인, 네가 필요하다”...시메오네의 7번 승부수 [박순규의 창]


엔리케의 완성된 시스템 떠나 시메오네의 새로운 7번으로
자유 아닌 책임 커졌지만…그리즈만 공백 메울 창조자로 새 출발

이강인의 입단을 환영하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SNS.

[더팩트 | 박순규 기자] 빛나는 트로피 뒤에 숨겨진 씁쓸함이 있었다.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2연패를 포함해 파리 생제르맹(PSG)에서 3시즌 동안 올려놓은 우승 트로피만 무려 12개. 그러나 '유럽 정상'이라는 화려한 명성에 비하면 이강인의 입지는 어딘가 허전했다. 중요한 순간마다 루이스 엔리케 감독의 구상에서 밀려나 '슈퍼 조커' 자리에 만족해야 했던 까닭이다.

결국 이강인이 ‘우승 도우미’라는 익숙한 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승부해야 할 무대로 향했다. 스페인 라리가 3대 명문이자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 마드리드)로의 전격 이적이다. 4000만 유로(약 671억 원)라는 대형 이적료와 함께 팀의 상징인 등번호 7번을 부여받았다. 미지의 세계로 가기보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땅, 스페인으로 복귀해 피치 위에서 주인공이 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아틀레티코는 25일 이강인과 2031년 6월 30일까지 계약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공격형 미드필더와 양쪽 측면을 모두 소화하는 왼발 미드필더로 소개하며 시야와 볼 컨트롤, 패스와 슈팅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구단이 단순한 아시아 시장 확대용 선수가 아니라 공격의 방향을 바꿀 기술적 자원으로 이강인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이강인의 이적은 단순한 팀 이적을 넘어, 리더십과 전술적 지향점이 판이하게 다른 두 명장의 그늘을 오가는 장대한 전환점이다. PSG의 루이스 엔리케 감독은 자신의 규율과 시스템을 절대적으로 앞세우며 선수단을 강하게 휘어잡는 독재형 리더다. 자신의 전술적 틀에서 벗어나는 개성을 용납하지 않는 스타일로, 핵심 공격수인 우스만 뎀벨레와도 불화를 겪으며 경기 외적인 갈등을 불사할 만큼 타협 없는 철권을 휘둘렀다. 이 때문에 판을 한순간에 뒤흔드는 이강인의 천재적인 왼발 패스와 창의적인 플레이는, 엔리케의 엄격한 시스템 속에서 '규격화된 톱니바퀴'이자 답답할 때 투입되는 '게임 체인저' 역할에 그치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AT 마드리드의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은 선수가 지닌 고유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팀의 무기로 삼는 '맞춤형' 덕장이자 용장이다. 선수 개개인의 특성을 기가 막히게 파악해 판을 짜고, 필드 위에서 야성과 투지를 100% 이끌어내는 데 탁월하다. 시메오네 감독은 "축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영혼으로 뛰는 것이다. 감독의 역할은 선수가 가진 최고의 잠재력을 피치 위에서 폭발시키도록 돕는 것이다"고 말한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은 2023년부터 이강인의 장점을 정확히 알고 이적을 희망했으며 이제 장점을 극대화시켜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사진은 2023 쿠팡플레이시리즈 2차전 맨체스터 시티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 경기를 지휘하는 시메오네 감독./더팩트 DB

시메오네의 전술에서 필요한 것은 엄격한 시스템의 이행이 아니다. 선수 본연의 개성과 장점을 살려 상대의 밀집 수비를 한 번에 파괴하고, 빈 공간에 송곳 같은 패스를 질러줄 '창의적인 열쇠'다. 그동안 AT 마드리드는 탄탄한 수비력은 최고였으나 2025~26시즌 리그 62골에 그칠 정도로 공격 답답증에 시달렸다. 특히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인 앙투안 그리즈만이 미국으로 떠나면서,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살려 2선에서 경기를 풀어줄 '에이스'의 부재는 치명적이었다.

2023년부터 이강인의 독보적인 왼발 감각과 창의성을 눈여겨봐 온 시메오네 감독이 월드컵 직후 그를 적임자로 낙점하고, 그리즈만의 7번 유니폼을 안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메오네도 세계에서 손꼽히게 강한 규율과 희생을 요구한다. 그의 축구에서는 공격수조차 수비에 가담하고, 모든 선수가 팀을 위해 뛰어야 한다.

차이는 통제의 강도보다 통제의 방식에 있다. 엔리케의 PSG는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운다. 정교하게 설계된 위치와 간격, 강한 전방 압박과 빠른 공수 전환을 모든 선수가 공유한다. 스타에게도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이 원칙은 PSG를 개인의 팀에서 시스템의 팀으로 바꿨고, 유럽 정상까지 끌어올렸다. 이강인 역시 그 체제에서 여러 포지션을 소화하며 많은 우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시스템이 완벽해질수록 이강인의 역설은 커졌다. 그는 중앙과 측면, 때로는 후방까지 맡을 수 있는 다재다능함 덕분에 유용한 선수가 됐지만, 바로 그 다재다능함 때문에 어느 한 자리의 절대적인 주인이 되지 못했다. 감독에게는 편리한 카드였으나 선수 자신에게는 정체성이 흐려지는 결과가 됐다. 큰 경기에서 선발보다 벤치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023 쿠팡플레이시리즈 2차전 맨체스터 시티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AT마드리드) 경기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가운데 필 포든이 슈팅을 시도하고 있다./더팩트 DB

시메오네의 아틀레티코에서는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리즈만의 이탈로 2선에서 공을 지키고,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마지막 패스를 공급할 창조자가 필요해졌다. 이강인의 왼발과 탈압박, 좁은 공간에서의 방향 전환은 아틀레티코가 그동안 부족했던 공격의 변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시메오네는 선수에게 막연한 자유를 주기보다 명확한 책임을 부여하는 감독이다. 상대와 경기 상황에 따라 선발과 역할을 조정하면서도 선수와 감독 사이의 신뢰, 각자의 위치에서 보여주는 헌신을 거듭 강조한다. 이강인이 수비 가담과 강한 압박이라는 요구를 견뎌낸다면, 공격에서는 PSG 시절보다 훨씬 많은 공과 결정권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강인에게 아틀레티코는 편안한 낙원이 아니다. 오히려 더 무거운 책임을 지는 시험대다. PSG에서는 부진해도 다른 스타가 경기를 해결했지만, 아틀레티코의 7번은 자신이 막힌 경기를 열어야 한다. 그리즈만의 번호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출전 보장이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서와 같다.

그러나 선수의 성장은 안전한 벤치보다 책임 있는 그라운드에서 이뤄진다. 중국 고사에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말이 있다. 천리마도 그 가치를 알아보는 백락을 만나야 세상에 이름을 떨친다는 뜻이다. 2023년부터 이강인을 지켜본 시메오네가 그의 장점을 정확히 알고 선택했다면, 이번 이적은 단순한 소속팀 변경을 넘어 선수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

PSG에서 이강인은 우승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 아틀레티코에서는 자신이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법을 증명해야 한다. ‘다용도 조커’라는 편리한 평가를 벗고, 자신의 왼발로 경기의 문을 여는 핵심 선수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강인이 완성해야 할 진짜 귀환이다.

전설적인 미드필더 지네딘 지단은 과거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진정한 클래스를 가진 선수는 팀이 가장 답답할 때 공간을 창조하고, 단 한 번의 패스로 경기의 지형을 바꾼다."

이강인은 이미 2019 U-20 월드컵 골든볼 수상과 2026 북중미 월드컵 등을 통해 결정적인 순간 경기를 뒤집는 능력을 증명해냈다. 감독의 통제에 갇히기보다 선수의 장점을 100% 살려주는 시메오네 감독의 두터운 신임 아래, 별도의 적응이 필요 없는 라리가 무대에서 보여줄 이강인의 퍼포먼스는 PSG 시절을 뛰어넘을 것으로 기대된다.

오는 8월 9일, 상암벌에서 열리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친선 경기는 그 화려한 전설의 서막이다. 엄격한 규율 속 '우승 도우미'에서 마침내 자신의 장점을 마음껏 펼칠 '7번 에이스'로 거듭난 이강인. 그가 시메오네의 손을 잡고 펼쳐낼 라리가의 새로운 잔혹극이자 환희의 드라마를 온 한국 축구 팬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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