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오랜 격언의 본질은 결국 '생태계'에 있다. 뛰어난 재능이 거목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비옥한 토양과 거대한 인프라가 필수적이라는 선조들의 혜안이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은 문호를 48개국으로 넓히며 '다양성의 축제'를 표방했다. 28일(한국시간)을 기점으로 길었던 조별리그의 막이 내리고 본격적인 32강 토너먼트 진출팀이 가려졌지만, 이 거대한 무대가 정작 증명해 낸 것은 냉엄한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축구계의 현실을 대변한다. 이제 전 세계 축구 인재의 나침반은 단 하나의 문장을 가리키고 있다. "축구를 하려면, 잉글랜드라는 용광로로 가라."
세계 최고의 무대인 월드컵은 단순히 한 달 넘게 펼쳐지는 공놀이의 축제가 아니다. 당대 전 세계 축구의 자본과 전술, 그리고 인재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자 바로미터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1248명 선수의 소속 리그 명단을 펼쳐 들었을 때 마주하는 숫자는, 현대 축구의 권력이 어디로 이동했는지를 냉정하게 투영하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이번 대회에만 무려 154명의 선수를 본선 무대에 올렸다. 2부 리그인 챔피언십(37명)을 비롯한 하부 시스템까지 합산하면 전체 참가 선수의 약 16%에 달하는 200명이 잉글랜드 축구 피라미드 시스템 안에서 길러졌다.
전통의 명가인 독일 분데스리가(94명)가 뒤를 쫓고, 프랑스 리그앙(78)와 스페인 라리가(74명), 이탈리아 세리에 A(66명)도 탑 5 자리를 지켰으나, 잉글랜드가 구축한 ‘포식자’로서의 생태계에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유럽 이외의 제3지역에서 거대 자본을 앞세운 사우디 프로리그(47명)와 개최국 프리미엄을 업은 메이저리그사커(MLS·44명)의 약진이다.
◆ 권력의 나침반이 움직인 역사
축구사(史)를 돌이켜보면 패권의 나침반은 시대의 경제적 흐름과 전술적 혁신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였다. 어느 한 리그가 영원한 절대 군주로 군림한 적은 없었다.
1970년대는 프란츠 베켄바우어를 앞세워 유러피언컵 3연패를 달성한 바이에른 뮌헨 중심의 독일 분데스리가가 전술적 조직력으로 세계를 호령했고,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는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등 투지와 기동력의 잉글랜드 클럽들이 유럽 정상을 독식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대홍수 시대였다. 전 세계의 대기업 자본이 이탈리아로 몰려들면서 이른바 ‘7공주(Seven Sisters)’라 불린 AS밀란 인테르밀란 유벤투스 AS로마 등 7 개 명문 클럽이 올스타전급 라인업을 구축했다. 플라티니부터 마라도나, 호나우두, 지단을 품었던 시절, 월드컵의 최대 지분은 단연 세리에 A의 몫이었다. 뒤이어 2010년대는 펩 과르디올라의 ‘티키타카’ 혁명과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메인 무대였던 스페인 라리가가 전술의 메카로서 월드컵 토너먼트 후반부를 장악했다.
이처럼 과거의 패권은 대륙과 리그 사이에 낭만적인 균형을 이루며 순환했다. 심지어 1970~1980년대만 하더라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 리그는 유럽에 인재를 빼앗기는 변방이 아니었다. 1970년 월드컵을 제패한 펠레의 브라질 대표팀은 23명 전원이 자국 리그파였고, 유럽 최강과 남미 최강이 맞붙던 인터콘티넨탈컵에서 남미 클럽들은 유럽의 거함들을 전술과 기술로 초토화하곤 했다.
◆ 보스만 판결, 그리고 거대 금융 자본의 습격
이 아름다운 대륙 간, 리그 간 균형을 깨부순 변곡점은 1995년의 ‘보스만 판결’이었다. 유럽연합(EU) 국적 선수들의 이동 제한이 전면 폐지되자, 유럽 클럽들은 남은 비유럽 쿼터를 남미의 특급 천재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여기에 남미 선수들의 이중 국적 취득 붐이 더해지며 남미 리그는 월드컵의 주역에서 유럽 빅리그의 거대한 ‘인재 공급처’로 그 성격이 재편됐다.
그리고 2026년 현재, 이 자본의 집중화가 낳은 최종 진화형이 바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다. 까다로운 노동 허가제(Work Permit)라는 장벽이 있음에도, EPL은 천문학적인 중계권 자본을 앞세워 이미 유럽에서 검증된 전 세계의 특급 인재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이제 EPL은 리그 내 중하위권 팀조차 타 대륙 명문 클럽 못지않은 자금력을 과시한다.
현 시점만 봐도 노르웨이의 괴물 스트라이커 엘링 홀란과 스페인 중원의 기둥 로드리(이상 맨체스터 시티)를 비롯해 프랑스 ‘레블뢰’ 군단의 후방을 책임지는 윌리엄 살리바(아스널), 아르헨티나 중원의 엔진 알렉시스 맥 알리스터(리버풀), 브라질의 브루노 기마랑이스(뉴캐슬)와 마테우스 쿠냐(맨유) 등 월드컵 우승 후보인 세계 축구 강국의 주력 멤버들이 대거 EPL에서 뛰고 있다.
2025~26 시즌 UEFA 주관 3개 클럽 대항전 결승전에 모두 잉글랜드 클럽이 한 자리씩 이름을 올리고, 다음 시즌 프리미어리그 전체 클럽의 거의 절반이 유럽 대항전에 나서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돈이 모이니 최고들이 몰리고, 최고들이 부딪치며 전술적 밀도가 가파르게 진화하는 ‘자본의 선순환 생태계’가 완성된 것이다.
◆ 2026년 월드컵이 던지는 메시지
프랑스 리그앙이 세계 최고의 선수를 수출하는 셀링 리그에 머물고,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자국 대표팀의 본선 진출 실패와 재정 악화로 신음하는 사이, 잉글랜드 축구 시스템은 6부 리그 브레인트리 타운FC 소속 선수(뉴질랜드의 토미 스미스)까지 월드컵 무대에 올려놓는 거대한 축구 용광로가 되었다.
48개국으로 문호를 넓히며 다양성과 확장을 노래하는 2026 북중미 월드컵. 그러나 그 화려한 축제의 뚜껑을 열었을 때 마주한 본질은 자본의 포식자가 전 세계의 재능을 독점해 만들어 낸 ‘잉글랜드 단독 천하’의 증명서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증명하고 싶다면, 먼저 잉글랜드라는 용광로를 거쳐라." 이번 월드컵이 전 세계 축구인들에게 던지는 가장 차갑고도 직관적인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