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투표 확대' 추세인데…우리는 사전투표 '존폐' 기로?


선관위 노조까지 가세한 '사전투표 폐지론'
주요 선진국은 투표 기회 확대 추세
"전면폐지 어려워…부실 관리 보완이 우선"

지난 6·3 지방선거 당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야권발 사전투표 폐지론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사진은 지난 1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의 한 건물 외벽에 6·3 지방선거 선거 용지 부족 사태와 관련해 재선거를 요구하는 글이 게시돼 있는 모습. /남윤호 기자

[더팩트ㅣ국회=김수민·김시형 기자] 지난 6·3 지방선거에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계기로 정치권에서 사전투표 폐지론이 급부상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노조까지 이에 동조하고 나선 가운데, 제도 폐지가 선거 관리 부실의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있을지를 놓고 정치권과 학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26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최근 '사전투표 폐지'를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거 이름을 올렸다. 과거의 부재자투표제를 부활시키는 대신 본투표를 하루에서 이틀로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행 사전투표제는 선거일 전 이틀 동안 전국 어디에서나 별도 신고 없이 투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반면 부재자투표는 일정한 사유가 있는 유권자가 사전에 신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선관위의 반복된 부실 관리는 실제 제도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5~16일 실시한 조사에서는 '사전투표를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52.7%로 '유지해야 한다'(44.2%)보다 높게 나타났다. 특히 선관위의 부실 관리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응답은 91.6%에 달했다. (무선 무작위 생성 표집 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자동응답 조사 방식. 표본 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이는 지난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 사전투표에서 이른바 '소쿠리 투표' 논란이 발생한 데 이어,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투표용지 부족 사태까지 벌어지면서 선거 시스템 자체에 대한 유권자들의 신뢰가 무너진 결과로 풀이된다. 법안에 참여한 한 의원은 "자꾸만 문제가 반복되는데 사전투표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며 "선진국인 줄 알았던 나라에서 참정권이 침해되는 상황에 청년층의 분노도 극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사전투표 폐지에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민주당은 선관위 개혁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사전투표제 자체를 없애기보다는 선관위 운영 방식과 관리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선관위 개혁 TF는 감사원 감사 확대와 조직 개편 등을 우선 검토하고 있으며, 투·개표 업무의 행정부 이관 방안도 논의 대상에 올려놓고 있다. 반면 국민의힘은 행정부 이관에는 부정적이다. 행정부가 선거를 관리하는 방식은 정치적 중립성 논란을 키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제도가 실제 폐지될 경우 선거 부실의 근본적 해법이 될 수 있을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3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4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소에서 유권자가 한 표를 행사하고 있는 모습. /서예원 기자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당 간 이해관계가 첨예해 전면 폐지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사전투표는 정당 간 유불리가 명확히 갈리는 사안"이라며 "사전투표가 부정선거라는 명확한 증거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제도를 폐지할 명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전면 폐지라는 극단적 처방보다는 논란이 되는 관외 사전투표 등에서 여야가 타협을 통해 점진적으로 제도를 조정해 나가는 것이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우리 선거 문화에서 사전투표가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비대해진 점도 있다. 사전투표는 이미 전체 투표의 30~40% 안팎을 차지할 정도로 정착했다. 별도 신고 없이 전국 어디서나 투표할 수 있다는 편의성 때문에 직장인과 대학생, 장거리 출퇴근자, 교대근무자 등의 이용 비중이 높다. 이 때문에 부재자투표로 회귀할 경우 사전 신고 절차가 부활하면서 일부 유권자의 투표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본투표를 이틀로 늘리더라도 주말 근무자나 타지역 거주자의 불편을 모두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이 사전투표제 자체가 아닌 선관위의 '선거관리 역량 부족'에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사전투표가 아닌 본투표 과정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투표용지 수급 체계와 현장 대응 매뉴얼, 관외 투표함 이송 과정의 GPS 실시간 추적 시스템 도입 등 정교한 보완책이 우선이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사전투표 폐지론은 참정권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선관위와 선거 관리 전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나온 주장"이라며 "관외 사전투표 등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 비용이 너무 크다 보니,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아예 본투표 위주로 선거 체제를 재편해 불신을 원천 차단하자는 취지로 보인다"며 설명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사전투표제는 유권자 편의성이 높은 편"이라며 "수많은 관외 투표 용지를 일일이 분류하고 우편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행정적 부담과 갈등이 유발되는 만큼, 제도를 무조건 폐지하기보다 관리체계의 맹점을 보완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요 선진국의 선거 제도 흐름 역시 유권자의 투표 기회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주마다 제도가 다르지만 조기투표, 우편투표, 부재자투표 등을 폭넓게 운영하고 있다. 조기투표를 실시하는 주에서는 평균 19일가량 투표가 가능하며 일부 주는 주말 투표도 허용한다.

일본 역시 선거일 이전 일정 기간 전국에서 기일 전 투표를 할 수 있도록 운영하고 있다. 사전투표 기간도 10여 일 정도로 한국보다 길고 접근성도 높은 편이다. 영국도 우편투표와 대리투표를 폭넓게 인정하는 등 선진국 상당수는 투표 기회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발전시켜 왔다.

sum@tf.co.kr

rocker@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