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호의 월드컵 파일] 내가 찌르고 차범근 선배가 쐈다...1986멕시코 '희망의 서막'


차범근 선배와 만남, 그리고 잉글랜드와 평가전

1986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미국 LA에서 가졌던 평가전에서 차범근 선배와 골을 합작했던 장면./SNS

[더팩트 | 최순호 전 국가대표] "독일 전지훈련, '세계적 클래스'를 눈앞에서 목격하다"

1986년 2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메이저 무대 복귀라는 거대한 사명을 안고 독일 전지훈련 길에 올랐다. 겨울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던 유럽의 그라운드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존재는 다름 아닌 당대 분데스리가를 호령하던 '차붐(Cha Boom)', 차범근 선배였다. 비록 소속팀 일정 등으로 인해 함께 발을 맞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자극이자 전환점이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 했던가. 옛것을 익히고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말처럼, 나는 그가 유럽에서 쌓아 올린 전통적인 공격수의 움직임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싶었다. 훈련장에 서면 내 플레이를 돋보이게 하는 것보다, 차 선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가 어떤 타이밍에 공간을 파고드는지, 수비수와의 몸싸움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전술 교본을 읽는 듯했다. 내가 한 걸음 물러서서 공간을 열어주면 차 선배가 폭발적인 스피드로 그 자리를 꿰찼다. 완벽하게 짜 맞춘 톱니바퀴처럼, 우리의 호흡은 짧은 만남 속에서도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리그 이탈리아전에서 활약하고 있는 변병주(왼쪽)와 최순호(맨 오른쪽)./KFA

"잉글랜드라는 거함을 마주하고 얻은 확신"

멕시코 본선 무대를 향한 본격적인 여정은 미국 콜로라도의 고지 적응훈련으로 이어졌다. 희박한 공기 속에서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는 극한의 훈련이 반복되던 중, 우리는 세계적인 강호 잉글랜드와 평가전을 치르게 되었다. 축구 종가이자 강력한 신체 조건을 자랑하는 잉글랜드는 당시 우리에게 넘기 힘든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다. 차범근 선배가 최전방에서 상대 수비진의 시선을 끌고 강력한 압박을 버텨주자, 이른바 '지킬 앤 하이드'처럼 전술적 변칙을 주는 내 플레이 공간이 넓어졌다. 현대 축구에서 말하는 '가짜 9번(False Nine)'이나 '새도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나는 이미 그때 차 선배와의 연계를 통해 구현하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이 차 선배의 파괴력에 균열을 일으키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우리도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차 선배와 함께라면 세계 어떤 수비진도 허물 수 있다"는 확신이 전율처럼 온몸을 감쌌다.

"LA의 환상적 서막, 32년 만의 본선을 향해"

멕시코 입국을 코앞에 두고 치러진 LA에서의 마지막 평가전은 우리 대표팀의 전술적 완성도를 최종 점검하는 무대였다. '세계 최강' 아르헨티나와 조별리그 경기에 대비해 페루의 명문 클럽 '알리안사 리마'와 마지막 모의고사를 치렀다. 경기장 분위기는 이미 월드컵 본선 못지않게 달아올랐고, 선수들의 집중력 또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전술적으로 한층 안정된 경기력을 선보이며 흐름을 주도하던 중, 마침내 연습했던 약속의 플레이가 실전에서 터져 나왔다.

미드필드 진영에서 공을 잡은 나는 상대 수비의 틈새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차 선배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찰나의 순간, 내가 넣어준 크로스는 환상적인 차 선배의 다이빙 헤더골로 연결됐다. 큰 무대 경험이 풍부한 차 선배는 탁월한 공간 활용과 한 박자 빠른 타이밍으로 수비수를 따돌렸고, 이어진 환상적인 헤더슛은 그대로 상대 골망을 흔들었다. 전율이 돋는 완벽한 마무리였다.

그 순간 느꼈던 짜릿함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세대를 뛰어넘은 두 공격수의 호흡이 완벽에 가깝게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무려 32년 만에 밟는 세계 최고의 무대 월드컵. LA에서의 골은 그 위대한 도전이 결코 무모한 외침이 아님을 증명하는 전주곡과도 같았다. 차 선배와의 완벽한 콤비네이션을 확인한 대표팀의 발걸음은, 본선 무대에 대한 터질 듯한 기대감을 안은 채 마침내 결전의 땅 멕시코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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