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영규 전문기자] 월드컵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시민들의 일상은 고요하기만 하다. 과거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월드컵 특유의 기대나 흥분은 찾아보기 힘들다. 1986년 멕시코 대회 이후 무려 '11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음에도, 이번 대회만큼 냉기가 흐르는 적은 없었다.
시민들의 관심이 차갑게 식다 보니 월드컵 중계에 나선 방송사(KBS, JTBC)의 수도 확 줄었고, 대회 붐업에도 소극적이다. 기업들의 마케팅 역시 자취를 감췄다. 길거리 응원은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운 분위기이며, 얼마전까지도 '붉은악마'의 공식 응원 계획조차 들리지 않았다.
KT가 월드컵 개막이 임박한 지난 7일 뒤늦게 대한축구협회, 붉은악마와 함께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026 월드컵' 거리관람 행사를 개최한다고 밝혔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응원 분위기는 좀처럼 조성되지 않고 있다. 이대로라면 자칫 축구계 '그들만의 월드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 협회 불통이 부른 외면... 한국축구 고사 위기, "축구 젖줄이 마른다"
국민들이 등을 돌린 이유는 명확하다. 대한축구협회의 일방적인 불통 행정과 불투명한 감독 인선 절차 논란이 끝내 해결되지 않은 채 월드컵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비록 정몽규 회장이 '월드컵 후 퇴진'이라는 카드를 던졌지만, 이미 돌아선 축구 팬들의 마음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다.
진짜 문제는 이처럼 썰렁한 월드컵 분위기가 비단 이번 대회의 흥행 실패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 축구계에는 한국 축구가 고사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가 한국 축구의 유소년 젖줄을 말리는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뼈아프다.
최근 일본 경제 전문 매체 '니케이 아시아'가 한국 축구에 대해 "한 시대의 끝을 맞이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이번 월드컵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결정할 분수령이 될 수 있다고 진단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매체는 "강력한 월드컵 성적은 새로운 시대를 긍정적으로 열 수 있지만, 조기 탈락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더 큰 혼란이 다가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 내부의 문제를 밖에서 더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대표팀은 다수의 선수가 유럽 빅리그에서 맹활약하며 역대 최강의 '황금세대'로 불린다. 이들의 압도적인 활약상을 고려하면 지금 안팎에서 불어오는 비판과 무관심은 더욱 안타깝고 심각하게 다가온다.
◆ 스타가 스타를 낳는 '선순환의 계보', 그리고 단절 위기
지금 유럽 무대를 호령해온 태극 전사들은 과거 2002년 한일 월드컵의 4강 신화를 보고 자란 이른바 '2002 월드컵 키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손흥민, 이재성 등이 붉은 물결을 보며 축구화를 신었고, 유치원생이던 황인범, 김민재, 황희찬 등 '96라인'이 그 유산을 먹고 자라 현재 대표팀의 핵심으로 우뚝 섰다. 이 축구 유망주들이 결국 '박지성 키즈'로 자라난 셈이고, 이제는 이들을 보고 자란 양민혁, 강성진, 윤도영 같은 '손흥민 키즈'들이 미래를 꿈꾸며 바통을 이어받고 있다.
한국 스포츠의 유소년 풀은 언제나 이처럼 걸출한 스타나 국가대표팀의 호성적을 이정표 삼아 유입되었다. 야구 역시 1990년대 후반 '찬호박(Chan Ho Park) 신드롬'을 보고 자란 류현진, 김광현이라는 '박찬호 키즈'가 탄생했고, 이들이 주역이 되어 이룩한 '2008 베이징 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 신화는 다시 이정후, 강백호, 원태인 같은 '베이징 키즈'로 이어지는 거대한 선순환을 만들었다. 골프의 박세리, 피겨의 김연아, 수영의 박태환 이후 해당 종목의 저변이 급격히 넓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한국 축구의 미래는 지금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최근 축구 국가대표 출신 방송인 안정환이 한 OTT 방송에서 "(유소년 축구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후배 송종국이 요즘 축구하는 아이들이 없어 고깃집을 오픈했다. 축구 상황이 안 좋으면 배우려는 유소년도 없다"며 한탄한 것은 결코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 국가대표팀 경기마저 관중석이 온전히 들어차지 않는 냉랭한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실제로 최근 축구계에서 유소년 선수 감소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2026시즌 초반 등록 현황 집계 자료에 따르면, 전국 유소년 등록 선수 수는 전년 동기 대비 약 3%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뜩이나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요즘 같아서는 축구를 하겠다는 어린이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연 관중 1000만 명 시대를 열며 호황을 누리는 프로야구 쪽으로 체육 인재들이 쏠리는 형국이다. 유소년 선수들이 부족해지는 현상은 결국 성인 축구와 국가대표팀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 흔들린 행정과 리더십, 이젠 선수들이 증명할 때
한국 축구는 이미 2024년 파리 올림픽 본선 탈락이라는 충격을 경험한 바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단골 출전국이던 한국이 '10회 연속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의 문턱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그 충격이 유소년 현장의 어려움으로 가중되는 마당에, 이번 월드컵마저 실패라는 선고를 받아들일 경우 한국 축구에 던져질 충격파는 감히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이미 역대 최강의 멤버를 꾸리고도 협회의 졸속 행정과 '자격 논란'의 중심에 선 감독의 전술 미비 탓에 국민들이 등을 돌리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제 꺼진 불씨를 다시 살릴 유일한 희망은 이번 본선 무대에 나설 대표팀 선수들의 면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오직 그들이 보여줄 개인 실력과 '성적'뿐이다.
마침 글로벌 스포츠 언론 '디애슬레틱'은 월드컵 참가국 48개국의 파워랭킹을 공개하며 대한민국의 순위를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15위로 책정했다. 우리 내부의 불협화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손흥민, 황인범, 이강인 등 선수 개개인의 자질을 높게 평가한 결과다. 유럽 무대에서 검증된 뛰어난 개인 능력을 갖춘 자원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주변의 조롱과 비판을 딛고 대표팀이 16강을 넘어 8강까지 도달할 수 있다면, 식었던 국민적 관심도 다시금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박찬호가 류현진을 낳고, 류현진 세대의 베이징 올림픽이 이정후를 낳았듯, 선배들이 안팎의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길을 열어줄 때 새로운 '월드컵 키즈'가 태어난다. 이번 월드컵 대표팀의 선전을 간절히 기대하는 이유다. 국민과 축구의 미래를 위해 기왕이면 8강 이상의 성적을 달성해 주길 염원한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미 황인범을 비롯한 우리 선수들은 8강을 눈높이로 두고 있다. 감독이 "32강이 1차 목표"라는 안이한 발표로 팬들의 공분을 샀지만, 사령탑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할지라도 풍부한 큰 무대 경험을 가진 우리 선수들이 피치 위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내면 된다. 최소한 그런 당당한 자세로 경기에 임해달라는 게 팬들의 바람이다. 경기 전부터 약해빠진 소리나 늘어놓으며 국민들의 화를 더 돋울 일이 무엇이 있는가.
벤치의 전술적 역량에 의문부호가 붙을지언정, 우리 선수들은 이미 유럽 빅리그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낸 검증된 자원들이다. 한국 축구의 젖줄을 다시 대기 위해서라도 이번 월드컵은 반드시 선전해야 한다. 그 위대한 도전의 첫 단추가 될 체코전의 쾌승 소식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