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선영 기자]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대규모 손실 사태와 관련한 은행권 제재 결정이 수개월째 늦어지면서 시장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금융감독원 제재심의위원회를 통과한 과징금 안건이 금융위원회 단계에서 잇따라 보류되면서 은행권은 최종 부담 규모를 확정하지 못한 채 경영 판단을 이어가고 있다.
6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KB국민·신한·하나·NH농협·SC제일은행 등 주요 판매 은행의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 관련 제재안을 아직 의결하지 못하고 있다. 당초 3월 결론이 예상됐던 과징금 안건은 4월 정례회의에서도 상정되지 못했고, 최종 결정 시점은 5월 이후로 다시 밀린 상태다.
현재 금융위가 검토 중인 과징금 규모는 약 1조4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금감원이 최초 산정한 약 4조원에서 단계적으로 감경된 수치지만, 최종 감경 폭을 둘러싼 판단이 엇갈리며 결론 도출이 지연되고 있다.
결정이 늦어지는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이 얽혀 있다. 우선 이번 제재는 금융소비자보호법 시행 이후 첫 '조 단위 과징금'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향후 대규모 불완전판매 제재의 기준이 되는 만큼 금융당국 입장에서는 수위를 쉽게 낮추기도, 그대로 확정하기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는 해석이다.
여기에 법적 리스크도 변수다. 최근 금융당국이 관련 제재 소송에서 잇따라 패소한 점이 영향을 미치면서 과징금 부과의 법리적 정합성을 더욱 엄격히 따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됐다.
정무적 판단 부담 역시 결정을 늦추는 요인으로 꼽힌다. 과징금 감경 시 '솜방망이' 논란이 불거질 수 있는 반면, 강경 기조를 유지할 경우 은행권 건전성과 '생산적 금융' 확대 정책과 충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 내부에서는 조 단위 과징금이 기업대출 등 자금 공급을 제약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제재 지연이 길어질수록 시장 부담이 커진다는 점이다.
은행권은 이미 자율배상을 통해 상당 부분 손실을 선제적으로 반영한 상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홍콩H지수 ELS 관련 자율배상 대상은 약 4만명으로, 평균 배상비율은 30~40% 수준이다. 현재까지 약 90% 내외의 배상이 진행됐으며, 총 배상 규모는 1조3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일부 은행은 관련 비용을 이미 실적에 반영했으며, 나머지도 순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과징금 규모가 확정되지 않으면서 은행권의 부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충당부채 반영 시점과 자본비율(CET1) 관리에 불확실성이 이어지고, 배당과 자사주 매입 등 주주환원 정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금융지주들이 '밸류업' 정책을 본격화하는 시점에서 대형 제재 리스크가 장기화되는 것은 경영 전략 수립에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당국은 "법리적 쟁점과 사실관계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더 이상 결정을 미루기 어렵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제재 수위보다 중요한 것은 예측 가능한 감독 기준이라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미 자율배상과 손실 인식은 상당 부분 진행됐는데, 과징금 규모만 확정되지 않으면서 경영 계획을 세우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제재 수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 기준과 일정이 명확해야 시장도 예측 가능하게 움직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