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ㅣ 유병철 전문기자]
# 발단 - 밀월관계
재선(2021년 1월)에 성공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체육계는 물론이고, 오랜 불교계 활동을 바탕으로 정관계에 두터운 인맥을 쌓았습니다. 특히 정치권은 여야를 넘어들며 다수의 유력인사와 친분이 깊습니다. 2019년 6월 IOC위원이 된 이후에는 그 영향력이 한층 강화됐죠. 2022년 3월 윤석열이 제20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도 이기흥 회장은 용산(대통령실)과 아주 가까웠습니다.
그가 대통령, 여권의 실세 K의원과 서울 강남의 모 호텔의 술집에서 사적으로 술자리를 갖고 폭탄주를 마셨다는 얘기도 퍼졌습니다(더팩트 확인 결과,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당연히 주무부서인 문화체육관광부(당시 장관 박보균, 이하 문체부)와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문체부의 눈치를 보기 바빴던 대한체육회가 오히려 문체부를 우습게 보는 기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이상한 방식이었지만 대한체육회의 ’체육자치‘는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파워를 과시했습니다.
# 전개 - 갈등과 격전
2막은 갈등을 넘어 격전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 때 이미 한 차례 문체부 장관을 지낸 바 있는 배우 유인촌이 2023년 10월 윤석열 정부의 두 번째 문체부 장관으로 부임하면서 ‘문체부 vs 대한체육회’의 파워게임이 벌어졌습니다. 2024년 파리 올림픽을 거치며 양측의 대립은 극에 달했죠. 문체부는 이기흥 회장은 3선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고, 대한체육회는 체육자율성과 IOC를 거론하며 정부의 간섭을 비판했습니다.
이기흥 회장은 충청 U대회 조직위원회의 인사에 개입해 특정인의 사무총장 임명을 취소시켰고, 당연직인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장관을 의식해 인천공항에서 미리 예정돼 있던 파리 올림픽 선수단의 해단식을 취소해버리는 해프닝까지 발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용산은 문체부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이기흥의 대한체육회를 ‘통제되지 않는 문제 집단’으로 규정했고, 회장 직무 정지에, 국무조정실(정부합동공직복무점검단), 감사원, 국세청, 그리고 경찰수사 등을 통해 대한체육회를 털었습니다.
# 화끈한 결말
아시다시피 양쪽이 다 망하는 결말이 나왔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2024년 12월 뜬끔없는 계엄선포와 이어지는 대통령 탄핵을 거치며 붕괴했습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를 비롯한 정권의 핵심인사들이 영어의 몸이 됐고, 지금도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5명이 출마한 대한체육회장 선거는 대이변이었습니다. 현역 프리미엄에 콘크리트 지지층을 내세워 ‘5자 필승’을 자신하던 이기흥 회장이 유승민 후보에게 뒤지며 2위에 그쳤습니다. 8년여 이기흥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죠.
겉으로는 이기흥 회장의 독주, 정부의 과도한 정치적 개입, 그리고 볼썽사나운 양쪽의 권력싸움에 피로감을 느낀 체육계가 젊은 유승민 회장의 당선을 반기는 모양새였습니다.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윤석열의 문체부가 이기흥을 떨어뜨리기 위해 유승민을 음으로 양으로 밀었다는 말이 나돌면서 뒤끝이 개운치 않았습니다.
# 속편 - 정권교체 후 체육계
아니나 다를까 지금 그 속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기흥 회장은 <더팩트>와의 만남에서 "만일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이 없었다면 나는 감옥에 갔을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그는 숱한 감사와 조사를 받았지만 아직 기소조차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다시 체육계 공직을 맡을 생각이 없다. 단, 정권교체가 된 만큼 대한체육회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부당한 탄압, 그리고 부당인사 및 비리 의혹 등 현 대한체육회의 병폐는 바로 잡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유승민 회장은 왕성한 활동을 펼치면서도 대한탁구협회장 재직 시절의 비리와 관련해 스포츠윤리센터,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징계요청 및 고발을 당했습니다. 내식구 감싸기식의 ‘솜방망이 징계’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대한탁구협회로부터 견책 처분을 받았고, 현재 경찰의 소환조사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회장이 흔들리니 대한체육회는 이기흥 회장 때와는 정반대로 힘이 없습니다. 문체부나 정치권력에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평이 많습니다.
# 한 죽음으로 재점화
이런 가운데 지난 3월 22일 ‘이기흥 사람’으로 평가받는 정동국 대한근대5종연맹 부회장이 67세의 나이에 갑작스런 심정지로 사망했습니다. 지인들은 고인이 문체부, 경찰, 검찰, 국무조정실, 대한체육회 감사실 등 다수의 기관으로부터 2년여에 걸쳐 조사 및 수사를 받은 것이 건강악화의 원인이 됐다며 분개했습니다.
이들은 체육인 132명의 서명을 받아 지난 4월 8일 청와대에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탄원서에는 ‘국민주권정부(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 과정 등 제반 사항에 대해 대한체육회 및 문체부 30여 명에 대한 내사 및 탐문조사를 벌였고, 윤 정부의 불법적인 개입이 상당 부분 확인됐다’고 주장했습니다.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입니다. <더팩트>의 취재 결과, 그 내용을 파악이 어려워도 민정수석실이 움직인 것은 확실합니다.
# 체육계도 ‘닥치고 정치’
정치권력과 체육계는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 정답일까요? 대기업 임원들 사이에는 ‘난로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절대권력(난로)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처세라는 것이죠. 너무 멀면 춥고, 반대로 너무 가까우면 순식간에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를 차용하면 이기흥 전 회장은 양 극단을 몸으로 겪은 인물입니다. 비리 의혹으로 2025년 국정감사에서 호된 질타를 받은 유승민 회장도 현재 ‘난로불’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이죠. 확실한 건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대한체육회는 막대한 공적자금이 들어가는 준정부기관입니다. ‘영혼이 없다’는 공무원이 될 필요는 없지만 정부와의 협조는 필수입니다. 또 정치권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만큼 정치논리와는 거를 둔, 청렴하면서도 당당한 ‘체육 자치’를 구현해야 합니다. 정치권력도 체육계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네 체육계가 스포츠 정신과는 거리가 먼 ‘닥치고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