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세종=정다운 기자] 이란이 세계 원유 수송의 ‘에너지 젖줄’인 호르무즈 해협 통과 조건으로 암호화폐를 요구하면서 400년 넘게 이어져 온 항행의 자유(Freedom of Navigation)가 흔들리고 있다. 국제사회가 이를 용인할 경우 말라카, 지브롤터 해협 등으로 유사 조치가 확산되며 해상 운임 상승과 함께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항행의 자유 개념은 17세기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네덜란드의 법학자 휴고 그로티우스의 저서 ‘자유해’에서 출발했다. 자유해론은 바다는 특정 국가의 소유가 될 수 없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오랜 기간 국제 관습으로 이어져 오다가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UNCLOS)에 반영됐고, 현재는 약 160 개국 이상이 참여하는 국제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UNCLOS상 호르무즈 해협과 같은 국제 해협에는 통과통항권(Transit Passage)이 적용돼 선박의 지속적이고 신속한 통행이 보장된다.
이란이 제시한 통행 조건은 국제사회가 암묵적으로 합의해 온 항행의 자유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특히 전후 복구 비용 충당같은 일시적 조치가 아닌 이를 상시화할 경우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커질 수 있다. 해협 통과 비용이 발생하면 해상 운임과 보험료 상승으로 이어지고, 원유 가격과 글로벌 물가 상승 압력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연해협에서 통행료를 부과한 사례는 없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수석연구원은 "특정 국가가 통행료를 부과하기 시작하면 다른 해협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며 "국제법에서 무해통항권(Innocent Passage)은 연안국에 위해를 가하지 않는 범위에서 통행을 허용하는 개념인데, 이를 넘어 통행료를 부과하는 것은 기존 해양 질서와 충돌할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도미노 확산 가능성도 제기된다. 말라카 해협과 지브롤터 해협 등 주요 해상 통로에서도 유사 조치가 이어질 경우 국제 해양 질서 전반이 흔들릴 수 있다.
다만 실제 확산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문종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해협을 낀 국가들이 일제히 통행료를 부과하는 구조로 가기는 쉽지 않다"며 "국제사회 고립과 무역 위축 부담이 크다"고 말했다.
이란이 암호화폐와 위안화를 결제수단으로 함께 거론한 점도 주목된다. 달러 중심의 ‘페트로달러’ 체계를 흔들고 제재를 우회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란이 위안화나 암호화폐 결제를 함께 언급한 것은 달러 중심의 페트로달러 체계를 흔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며 "미국의 제재를 우회하려는 수단이자 에너지 결제 질서를 다변화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암호화폐의 변동성과 제도적 한계를 고려할 때 실제 결제 수단으로 안착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덧붙였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수송량의 약 20%가 지나는 핵심 해상 통로다. 현재 우리나라 유조선 7척, 약 1400만 배럴 규모 물량이 이 해역에 발이 묶인 상태로 파악된다. 이란은 대형 유조선의 경우 통과 비용을 최대 200만달러 수준(약 30억원)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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