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선영 기자]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달러 유동성은 상당히 양호하다"고 밝히면서 고환율을 곧바로 외화 유동성 위기로 보긴 어렵다는 한국은행 안팎의 인식이 다시 확인됐다. 다만 원·달러 환율이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외환당국도 시장 안정에 나선 만큼 고환율 장기화에 대한 경계는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신 후보자는 전날 서울 중구 한화금융플라자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 첫 출근길에서 환율 관련 질문에 "비록 환율은 높지만 달러 유동성은 상당히 양호하다"고 말했다. 또 "환율 레벨 자체는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며 "예전처럼 환율하고 금융 불안정을 직결시키는 것은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다"고 밝혔다.
전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4.2원 오른 1519.9원으로 출발했고, 장중 한때 1536.9원까지 치솟은 뒤 1530.1원에 주간거래를 마쳤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이던 2009년 3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다만 이날 환율은 중동전쟁의 종전 기대감 속 하락 출발했다. 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오후 3시 30분 종가 기준 전 거래일 대비 21.6원 내린 달러당 1508.5원에 개장했다. 전날 1536.9원까지 치솟았으나 이날 낙폭이 확대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한 종전 합의 발언에 이란 대통령이 가세하며 시장내 위험자산 선호심리가 급격히 회복된 것으로 풀이된다.
신 후보자 발언은 한국은행이 최근 제시한 설명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은행 국제국은 1월 19일 공식 블로그에서 외환시장을 달러를 빌리고 빌려주는 외화자금시장과 달러를 직접 사고파는 현물환시장으로 나눠 설명했다. 한은은 외화자금시장에 대해 "싼 이자에라도 빌려주려는 주체들이 많아 달러가 풍부한 상황"이라며 "달러자금이 풍부해 싼 이자로 빌리기 쉬운 지금을 외환시장의 위기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반면 현물환시장에서는 달러를 팔기보다 사려는 수요가 우세해 원·달러 환율이 오르고 잘 떨어지지 않는 구조라고 짚었다.
한은이 말하는 '달러 유동성 양호'는 환율 수준이 낮다는 뜻이 아니다. 국내 금융기관이나 시장 참가자들이 해외에서 달러를 조달하는 통로가 당장 막힌 상황은 아니라는 의미에 가깝다. 실제 한은 블로그는 외화자금시장에서는 달러 조달 여건이 비교적 안정적이지만 현물환시장에서는 달러 매수 수요가 강해 환율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지금의 고환율은 '달러를 아예 구할 수 없는 위기'라기보다 현물환시장 수급과 대외 불안 심리가 겹친 결과라는 게 한은의 기본 인식이다.
외화 안전판 지표도 당장은 급격한 이상 신호를 가리키지 않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2월 말 외환보유액은 4276억2000만달러로 전월 말보다 17억2000만달러 늘었다. 또 한은 '금융안정 상황' 자료를 보면 2025년 3분기 말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은 37.5%로 2021년 이후 평균인 37.7%를 소폭 밑돌았다.
다만 고환율 부담 자체를 가볍게 볼 수는 없다는 게 한은의 공식 문구다. 금통위는 1월 15일 통화정책방향에서 "높아진 환율이 상방 리스크로 잠재해 있다"고 밝혔고, 2월 26일 통화정책방향에서는 "수도권 주택가격 및 가계부채 리스크, 환율 변동성의 영향 등에 계속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명시했다. 기준금리는 2월 회의에서 연 2.50%로 동결됐다. 달러 유동성은 양호하다는 진단과 환율 변동성은 경계해야 한다는 판단이 동시에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새로 공개된 외환당국 개입 규모도 시장의 긴장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은행이 전날 공개한 '외환당국 순거래'에 따르면 외환당국은 지난해 4분기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224억6700만달러를 순매도했다. 관련 통계 공개 이후 분기 기준 최대 규모다. 지난해 4분기 평균 원·달러 환율은 1451.96원으로 전분기 평균 1386.13원보다 65.83원 높아졌다. 올해 들어 환율이 1500원대를 넘어선 만큼, 당국이 이미 상당한 규모의 시장안정화 조치를 단행했음에도 환율 상방 압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한국은행도 고환율 장기화의 부작용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1월 블로그를 통해 위기설이나 비관론이 경제주체들 사이에 폭넓게 퍼질 경우 환율에 대한 일방향의 기대가 형성되면서 외환시장에서 악순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은 외화자금시장에서 달러를 구하기 어려운 국면이 아니더라도, 높은 환율이 오래 지속되면 심리와 수급을 자극해 현물환시장의 불안이 다시 외화자금시장으로 번질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한은은 외환시장 쏠림 현상이 뚜렷해지면 대응할 것이라는 의견도 분명히 했다. 윤경수 한국은행 국제국장은 전날 오후 예정에 없던 기자 브리핑을 열고 "특정 환율 수준을 직접 목표로 하고 있지 않지만, 최근 환율이 속도 측면에서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원·달러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1530원대로 치솟은 데 따른 것이다.
윤 국장은 "원화의 절하 폭이 다른 통화에 비해 상당히 빠르다"며 "달러 대비 한 2배 이상 더 빠르게 절하되고 있어 긴장감을 갖고 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다른 통화와) 괴리가 심해지면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 주식자금 유출이 환율 급등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윤 국장은 "이번 달 외국인 주식자금이 매일 2조~3조 원씩 상당한 규모로 나가고 있다"며 "수급 측면에서 가장 큰 환율 상승 압력의 요인으로 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 달러 조달 여건이 과거 위기 때보다 낫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고환율 장기화가 물가와 금융안정, 시장 심리에 미칠 파장을 계속 점검해야 한다는 과제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지금 환율 수준을 두고 곧바로 외화 조달 위기로 보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1500원 안팎의 높은 환율이 길어지면 기업과 금융회사들의 심리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현재 유동성이 괜찮다고 해서 경계까지 풀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주식시장 불안과 위험회피 심리가 장기화할 경우 원·달러 환율이 2009년 3월 고점인 1580원 안팎까지 오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원유 도입 단가 상승으로 달러 유동성 유입 축소는 불가피하다"면서도 "현재 환율 수준은 이미 위기 국면에 준하는 레벨"이라고 분석했다.
권 연구원은 "리스크 오프(위험 회피) 심리가 이어질 경우 원·달러 환율은 2009년 3월 고점인 1580원 안쪽에서 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다"면서도 "이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가까운 오버슈팅 구간"이라고 설명했다.
반대로 올해 2분기에는 원·달러 환율이 안정화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지정학적 리스크가 점차 완화한다는 전제하에 원·달러 환율 상단이 2008년 고점인 1570원을 상회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며 "2분기에는 환율이 다시 1400원대로 하락하는 흐름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