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우지수 기자] 국내 석유화학 업계가 중동 전쟁으로 인한 나프타(납사) 수급난으로 공장 가동 중단 위기에 처하면서 플라스틱 등 제조업 전반으로 연쇄 타격이 우려된다. 정부가 다각적인 지원책을 제시하며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현장 불안감은 여전한 모양새다.
21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이전부터 이어진 글로벌 공급 과잉으로 사업 재편을 추진하던 중 이번 중동 사태로 직격탄을 맞았다. 공급 위기가 거론되는 나프타(납사)는 원유에서 추출되는 기초 원료다. 나프타를 고온으로 분해하면 에틸렌·프로필렌 등 플라스틱과 합성섬유 재료가 나온다. 이 때문에 나프타 공급이 막히면 자동차 타이어부터, 페트병, 비닐봉투까지 제조업 전반에 연쇄 타격이 발생한다.
국내 업체들은 이런 핵심 원료 물량의 절반을 중동 등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물류망이 끊기면서 비상이 걸렸다. 업계에서는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나프타 재고가 약 2주 분량에 불과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유사들은 공장 가동률을 낮추며 버티고 있지만 원료 확보가 늦어질 경우 가동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국내 주요 석유화학사와 대형 생산 시설들은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국내 최대 에틸렌 생산 시설 여천NCC는 원료 조달 지연을 이유로 업계 최초로 '불가항력'을 선언하고 공장 가동률을 60%대로 낮췄다. 불가항력이란 전쟁이나 천재지변처럼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으로 계약을 지키지 못할 때 법적 책임이나 위약금을 피하기 위해 고객사에게 미리 알리는 조치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 역시 나프타 분해 시설(NCC) 가동률을 60% 수준으로 하향 조정하고 고객사에 고부가가치 제품의 공급 차질 가능성을 알렸다. 한화솔루션은 원료 확보 어려움으로 일부 설비 가동 중단에 직면했으며 롯데케미칼은 수출 물량을 줄이고 국내 공급 비중을 기존 45%에서 90%까지 확대하는 등 노력하고 있다.
에틸렌-나프타 스프레드(가격차)가 역사적 최저치인 톤당 24달러 수준으로 추락해 제품을 팔수록 적자가 쌓이는 구조도 문제다. 에틸렌-나프타 스프레드는 나프타로 만들어내는 제품 에틸렌의 가격에서 기초 원료 나프타 가격을 뺀 수치로 이 차이가 커야 기업이 이익을 남길 수 있다. 석유화학 업체의 수익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로, 손익분기점을 맞추려면 최소 300달러를 넘겨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가 나프타를 경제안보품목으로 한시 지정하고 비축유 방출 등 대책을 내놨지만 업계 일각에선 다가오는 셧다운 위기를 틀어막기에는 시간이 촉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유사가 비축유를 지원받아 원유를 정제하더라도 자체 계열사 NCC에 물량을 우선 공급할 가능성이 커 외부 업체까지 혜택이 닿기 어렵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미국이나 러시아 등 비중동 지역에서 대체 물량을 들여오는 방안도 마땅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한 석화업계 관계자는 "미국 등에서 물량을 사 오려면 운송에 40일 이상 걸리고 러시아산은 거리가 가깝지만 세계적으로 수요가 많아 가격이 크게 올라있는 상황"이라며 "비싼 원료로 제품을 만들면 전방 산업으로 가격 인상 부담이 전가돼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 부처가 수급 안정화 조치를 발표하며 총력 지원을 약속했지만 업계의 위기감은 여전하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관심을 두고 지원하려는 방향은 긍정적"이라면서도 "사태가 연말까지 장기화할 경우 석유화학과 플라스틱을 사용하는 모든 후방 산업이 다 같이 무너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19일 열린 국회 간담회에서도 정부 차원의 근본적인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호소가 이어졌다. 정종은 LG화학 상무는 "정부가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는 전략 자원으로 관리하며 저장 시설을 확충하고 있지만 나프타는 그렇지 못하다"며 "에틸렌 생산의 핵심 원료인 만큼 정부 차원의 관리 지원 체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회의에선 올해 중순까지 나프타 수급난 상황이 이어질 것이란 예상도 나왔다. 배용재 여천NCC 전무는 "에틸렌 공급 업체로서 수출보다는 국내에서 플라스틱을 업체 등에 전략 판매를 하고 있음에도 필요한 나프타 물량을 다 공급하지 못한 상황"이라며 "이같은 상황이 4~5월간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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