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세대교체, 김길리의 '왕관'과 최민정의 '전설' [박순규의 창]


21일 2026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김길리 금메달-최민정 은메달의 의미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간판 김길리(오른쪽)와 최민정이 21일(한국 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시상식에서 기뻐하고 있다./밀라노=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옛말에 ‘매화향자고한래(梅花香自苦寒來)’라 했다. 매화는 뼈를 깎는 매서운 추위를 겪고서야 비로소 맑고 짙은 향기를 뿜어낸다는 뜻이다. 스포츠가 각본 없는 드라마로 불리는 이유 역시, 이처럼 잔혹한 좌절의 겨울을 견뎌낸 뒤에 피어나는 눈부신 비상(飛上)이 있기 때문이다.

21일(한국 시간)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마지막 날,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펼쳐진 여자 1500m 결선은 한국 쇼트트랙의 저력과 위대한 세대교체를 동시에 증명한 완벽한 피날레였다.

김길리(21·성남시청)와 최민정(27·성남시청), 한국 여자 쇼트트랙을 이끄는 신구 쌍두마차가 나란히 금메달과 은메달을 목에 걸며 이번 대회 최고의 명장면을 완성했다. 두 선수가 얼음판에 오를 때마다 "앞에서 만나자"고 나눴다던 이 짧은 약속은 나란히 시상대 높은 곳에 올라 애국가를 들으며 올림픽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실이 됐다.

이번 올림픽은 김길리에게 유독 가혹하게 시작됐다. 첫 종목이었던 혼성 계주 준결선에서 다른 선수의 넘어짐에 휩쓸려 넘어졌고, 이어진 500m에서도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대회 중반까지 이어진 '노메달'의 충격과 에이스로서의 중압감은 생애 첫 올림픽 무대에 선 선수에게 뼈를 에이는 추위였다.

하지만 김길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1000m 동메달로 예열을 마친 그는 3000m 계주에서 폭발적인 막판 스퍼트로 이탈리아를 꺾고 금메달을 견인하더니, 마침내 1500m에서 압도적인 레이스로 개인전 첫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준결선에서 강력한 경쟁자들이 대거 탈락하는 변수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페이스를 유지했고, 3바퀴를 남기고 완벽하게 승부를 갈랐다. 눈물로 젖었던 첫 올림픽 무대를 가장 환한 웃음으로 마무리하며, 자신이 왜 짙은 향기를 품은 새로운 여제인지 전 세계에 증명해 냈다.

무너짐을 딛고 이룩한 2관왕과 함께 모두 3개의 메달을 수확한 새로운 여제, 김길리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역사다. 푸른색은 쪽빛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 그 눈부신 푸른빛이 탄생하기까지는 언제나 든든한 쪽빛 버팀목, 최민정이 있었다.

이번 1500m 결선에서 최민정은 단일 종목 최초의 올림픽 3연패라는 대기록을 아쉽게 놓쳤다. 하지만 그가 목에 건 은메달의 무게는 결코 금메달에 뒤지지 않는다. 직전 3000m 계주 금메달로 역대 최다 메달 타이(6개)를 이뤘던 그는, 이번 은메달을 추가하며 동·하계 올림픽을 통틀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많은 메달(7개)을 획득한 전무후무한 올림피언으로 우뚝 섰다. 후배의 거침없는 질주를 묵묵히 뒤에서 받쳐주며 완벽한 1, 2위 피니시를 완성한 최민정의 모습은, 단순한 양보를 넘어 한국 쇼트트랙의 품격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날의 1500m 레이스는 단순한 금, 은 싹쓸이가 아니다. 숱한 위기와 변수 속에서도 묵묵히 제 몫을 다해낸 두 선수의 피와 땀이 빚어낸 결실이다. 한 명은 칠흑 같은 부진의 겨울을 딛고 일어나 마침내 왕관을 썼고, 다른 한 명은 후배의 성장을 곁에서 지지하며 한국 스포츠 역사의 가장 높은 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가장 빛나는 순간,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 뒤 빙판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김길리와 최민정. 이들의 뭉클한 포옹은 쇼트트랙 강국의 자존심을 지켜낸 안도감이자, 앞으로도 계속될 한국 쇼트트랙의 눈부신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린 포옹이다. 밀라노의 차가운 얼음판을 가장 뜨겁게 녹인 두 영웅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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