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한림 기자]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해 코스피 전 상장사를 대상으로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를 전격 의무화했다. 오는 2026년 5월까지 자산 5000억원 미만 코스피 상장사들도 모두 이 대열에 합류해야 한다. 주주와 투자자 보호라는 정책적 온기를 투자처인 기업에도 불어넣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정책의 주역이 돼야 할 현장의 온도는 차갑다 못해 무관심에 가깝다. "왜 굳이 해야 하나"라는 근별적 의구심부터 "의무화 소식조차 몰랐다"는 반응까지 나온다. 이처럼 현장에서는 정부의 속도전이 공감대를 얻지 못해 '숙제'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팩트>가 만난 자산 5000억원 미만 중소 상장사의 공시 담당자 A씨는 공시 의무화 기조에 대한 현장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글쎄"라고 요약했다. 기업지배구조보고서 의무화가 기업 가치를 높이는 기회라기보다 형식적인 행정 절차로 치부되고 있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공시 의무화가 가져올 순기능을 부정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A씨는 정책이 실효성을 거두려면 제재 수준이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은 철저히 비용 대비 효율로 움직인다"며 "이 제도를 지키기 위해 전문 인력이나 공시 담당자를 채용하는 비용보다 위반했을 때 내야 하는 제재금이 더 저렴하다면 어느 기업이 조직을 갖추고 사람을 뽑겠나"고 반문했다.
벌이 있어야 법이 산다는 논리다. 명확한 페널티가 전제되지 않은 자율적 의무화는 대표이사나 이사회 등 기업 경영진에게 인력 충원이나 시스템 구축을 위한 명분을 주지 못한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중소기업 중 일부는 업종 특성 상 채용 여건이 어려워 장애인 고용 의무를 지키는 대신 부담금을 내는 방식을 택하듯이 공시 또한 '가성비'를 따지는 영역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대목이다.
중소 상장사들의 현실적인 인력 구성도 문제다. 매년 사업보고서를 공시하는 2~3월 '공시 시즌'에 지배구조보고서 작성 업무까지 더해지면서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업무 하중이 임계치에 다다랐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또 다른 자산 5000억원 미만 상장사의 경영지원실 소속 차장 B씨는 매년 공시 시즌만 되면 공시 담당자로 변신한다. 더군다나 B씨가 속한 기업은 모든 공시를 외부 컨설팅업체를 통해 검토를 받고 진행해 왔다. 그는 이사회 동의를 얻고 회사의 컨설팅업체의 가교 역할만 할 뿐이다. 회사가 공시 업무만 하는 인력을 채용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본업'이 있는 직원이 특정 기간에 다른 업무를 대신 하는 형태다.
B씨는 "알게 모르게 대부분 상장사가 공시를 전문 인력이 아닌 외부 컨설팅에 치중하고, 대표이사나 이사회에서도 큰 관심이 없어 개인의 펜 끝에 의존하는 공시를 한다"며 "기존에 해야 할 일도 있고 전담 인력이 없으니 가이드라인을 공부할 시간도 부족해 결국 과거 보고서를 보고 짜집기를 하거나 외부 업체가 써준 문구를 그대로 옮겨 적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금융당국이 공시 의무화를 밀어붙이는 배경에는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투명성 확보다. 당국은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공시가 투자자에게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알리는 핵심 지표이자 장기적으로는 기업 가치를 제고하는 밸류업의 초석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지난 2024년부터 자산 5000억원 이상 기업으로 대상을 넓힌 데 이어, 올해 상반기까지 전면 의무화를 목표로 가이드라인 배포와 설명회 개최 등 제도 안착에 사활을 걸고 있다. 나아가 ESG 공시, 영문 공시 등도 전격 의무화가 추진 중이다.
문제는 이같이 진행된 공시가 이번 지배구조보고서 공시 의무화의 목적인 투자자 보호라는 취지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정교한 가치 판단이 필요한 지배구조 지표를 실무자 한 명의 판단이나 외부 업체의 표준에 맡긴다면 기업의 실제 내부 사정과는 동떨어진 형식적 보고서가 양산될 우려가 커서다.
조직 내부의 소통 부재도 걸림돌이다. 20~30년 경력의 관리형 임원들은 기존의 숫자 중심 공시에는 익숙하나 정성적 서술이 필요한 지배구조보고서의 취지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있다는 제언이다. 금융당국이 공시 담당자를 초청해 공시 의무화에 대한 설명회를 열어도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실제 승인자인 대표이사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역설도 의무화를 향한 시선이 따가운 이유다.
☞ [공시의 그늘 下]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