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드 갓'도 집어삼킨 빙판... 차준환의 '4위'가 더 빛나는 이유 [박순규의 창]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간판 차준환이 14일(한국 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 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연기를 펼치고 있다./밀라노=뉴시스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올림픽이라는 무대는 잔인하다. 그중에서도 이번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남자 싱글 경기는 유독 가혹했다.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이 줄줄이 빙판 위에 쓰러졌고, 예측은 빗나갔다. 이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준환이 14일 오전(한국시간) 기록한 ‘4위’는 단순한 순위 그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간판 차준환은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남자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기술 점수(TES) 95.16점에 예술 점수(PCS) 87.04점, 감점 1점으로 181.20점을 받았다. 지난 10일 쇼트프로그램에서 시즌 최고점인 92.72점을 받아 6위에 올랐던 차준환은 합계 273.92점으로 최종 4위를 기록하며 기대했던 메달을 목에 걸지 못했다.

두 번째 점프 실수만 없었다면 충분히 메달권 진입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어서 더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충격은 단연 ‘쿼드 갓(Quad God)’ 일리야 말리닌(미국)의 추락이었다. 6종의 4회전 점프(쿼드러플)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던 말리닌조차 밀라노의 빙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기인 고난도 점프에서 잇따라 실수를 범하며 엉덩방아를 찧었고, 결국 8위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점프 기계'라 불리던 그가 무너질 정도로 이번 대회의 빙질 컨디션은 악명을 떨쳤다.

금메달 유력 후보인 미국의 쿼드 갓 일리야 말리닌이 점프 실수를 하고 있다./밀라노=뉴시스

피겨와 쇼트트랙이 함께 열리는 경기장 특성상 얼음은 무르고 물기가 많았다. 쇼트트랙 선수들조차 "날이 박히지 않는다"고 호소했던 그 빙판은, 섬세한 엣지 컨트롤과 폭발적인 도약력이 필요한 남자 싱글 선수들에게는 지뢰밭이나 다름없었다.

차준환 역시 이 변수를 피하지 못했다. 쇼트프로그램 6위에서 역전을 노리며 야심 차게 비상했으나, 두 번째 점프인 쿼드러플 토루프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차준환의 진가는 그 직후에 드러났다. 말리닌이 첫 실수 이후 급격히 흔들리며 연쇄적인 점프 난조를 보인 것과 달리, 차준환은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그는 착지 실수의 충격을 딛고 남은 점프 과제인 트리플 악셀과 콤비네이션 점프를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쿼드 갓’마저 집어삼킨 빙판 위에서, 차준환은 끝까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신이 준비한 연기를 마쳤다. 이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지난 두 번의 올림픽을 거치며 얼마나 단단한 ‘멘탈’을 가진 선수로 성장했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한국 남자 싱글 역대 최고 성적을 또 한 번 경신한 4위. 비록 메달권인 3위와 단 0.98점 차를 좁히지 못해 시상대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세계 최강자들이 줄지어 무너지는 악조건 속에서 거둔 성과이기에 그 의미는 남다르다. 2018 평창의 15위, 2022 베이징의 5위, 그리고 2026 밀라노의 4위. 차준환은 멈추지 않고 전진해왔다.

누군가는 메달을 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신’이라 불리던 선수도 8위로 추락한 이변의 현장에서, 끝까지 중심을 잡고 아름다운 연기를 펼친 차준환의 4위는 ‘실패’가 아닌 ‘위대한 생존’이자 ‘증명’이었다. 빙질 탓도, 불운 탓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 차준환에게, 우리는 메달보다 더 뜨거운 박수를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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