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박호윤 전문기자]
◆종목을 넘어 최초의 압도적 세계랭킹 1위
대한민국 스포츠사에는 이름 석 자만으로도 전 국민의 가슴을 벅차 오르게 했던 ‘여제(女帝)’들이 존재했다. IMF 외환위기의 고통 속에서 '맨발의 투혼'으로 희망을 쏘아 올린 박세리, 피겨 변방이었던 한국에서 기적처럼 나타나 빙판 위의 예술로 승화시킨 김연아, 그리고 압도적인 폭발력으로 얼음을 지배했던 빙속 여제 이상화까지. 이들은 종목과 시대를 달리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단순히 승리만을 좇는 기술자를 넘어, ‘할 수 있다’는 국가적 자부심을 심어준 시대의 아이콘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2026년 현재, 우리는 배드민턴 코트 위에서 이 레전드들의 정수가 한 몸에 깃든 듯한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세계 배드민턴 여제 안세영이다. 안세영의 일인천하를 지켜보며 과거의 레전드들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과한 비약이 아니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압도적 세계 1위’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박세리의 투혼 : 사냥개 근성으로 코트를 누비다
먼저 안세영에게선 박세리의 강인한 투혼이 읽힌다. 박세리는 고난을 뚫고 나가는 한국인의 저력을 상징했다. 단순히 공을 잘 치는 것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승리를 쟁취하는 ‘사냥개’ 같은 근성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같은 근성으로 LPGA투어에서 메이저 6승 포함, 25승을 기록했고, 아시아선수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바 있다)
안세영의 경기 방식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셔틀콕이 코트 구석 어디에 떨어지든, 무릎과 허벅지에 이상이 생기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에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혼신을 다해 몸을 던져 셔틀콕을 살려내는 모습은 상대를 질식하게 만든다. 부상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묵묵히 코트를 지켜내는 모습은 28년 전 맨발로 해저드에 들어갔던 박세리의 그것과 닮아 있다.
◆김연아의 우아함 : 코트 위에서 펼쳐지는 예술적 플레이
안세영의 풋워크를 유심히 살피다 보면 자연스레 김연아가 겹쳐 보인다. 김연아는 완벽한 점프와 우아한 스텝, 격정적인 감정 연기로 피겨스케이팅을 단순한 스포츠에서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밴쿠버 올림픽 금메달과 소치 올림픽 은메달 수상)
안세영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경기는 격렬하지만 아름답다. 배드민턴은 본래 찰나의 순간에 승부가 결정되는 급박한 종목이다. 그러나 안세영은 그 혼란 속에서도 유독 부드럽고 우아하다. 군더더기 없는 발놀림으로 상대의 강력한 스매시를 무력화시키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코트의 공간을 지배한다.
빠르고 정확한 스텝, 랠리 중에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는 상대를 거칠게 압박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완벽함’을 지니고 있다. 김연아가 빙판 위를 유영하듯, 안세영은 코트 위에서 자신만의 플레이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
◆이상화의 견고함 : 흔들리지 않는 철벽의 수비력
빙속 여제 이상화가 압도적인 하체 힘으로 상대의 추격 의지를 꺾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듯, 안세영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강인한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철벽 수비를 구축한다. 안세영의 경기에서 가장 흔한 풍경은 랠리가 길어질수록 상대 선수가 먼저 지쳐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다.(이상화는 밴쿠버, 소치 올림픽 여자 500미터 2연패에 이어 평창 은메달까지, 올림픽 3연속 메달리스트다)
상대의 날카로운 공격을 모두 받아내며 오히려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이른바 ‘질식 수비’는 압도적 체력과 정신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전략이다. 이상화가 스타트부터 피니시까지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폭발력을 유지했듯, 안세영은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상대의 숨통을 조이는 견고함을 유지한다. 세계 최정상급 선수들조차 무력감을 느끼며 무너지는 이유다.
◆기록이 증명하는 위엄, 그리고 본질을 향한 우직함
안세영의 위대함은 수치가 증명한다. 2025년 단일 시즌 최다승 타이 기록(11승)과 최고 승률(94.8%)을 경신한 그는 올해도 멈추지 않는다. 말레이시아 오픈 3연패, 인도 오픈 2연패를 포함해 최근 6개 대회 연속 우승과 30연승이라는 파죽지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세계 2위 왕즈이를 상대로 10연승을 거두는 압도적 전적은 그가 라이벌조차 허용하지 않는 ‘절대 강자’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안세영이 진정 특별한 이유는 그의 ‘태도’에 있다. 요즘은 스타가 되기 전에 이미 스타처럼 소비되는 시대다. 성과보다 이미지가 먼저 만들어지는 풍조 속에서 안세영은 의도적으로 이를 외면하고 있다. 쏟아지는 광고와 방송 섭외를 뒤로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은 명확하다"며 훈련장으로 향하는 그의 고집은, 과거의 여제들이 걸었던 길과 일치한다. 오직 본연의 무대 위에서만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그 우직함이 안세영을 더욱 빛나게 한다.
우리는 지금 박세리의 투혼, 김연아의 우아함, 이상화의 견고함을 모두 품은 채 자신만의 색깔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는 여제를 보고 있다. 안세영은 대한민국 스포츠가 가졌던 모든 영광스러운 기억을 한꺼번에 소환하며, 동시에 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