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손원태 기자] "폐점한다고요? 이번 주만 운영하고 아예 중단하는 거예요?"
12월 25일 저녁 늦게 찾은 홈플러스 가양점. 크리스마스 캐럴이 매장 가득히 울렸지만, 사람들은 휑한 매대를 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차장은 성탄절 막바지 파티를 준비하려는 차량들로 빼곡히 들어섰다. 그러나 매장 입구로 진입하는 순간 시린 겨울바람과 같이 한산한 공기가 느껴졌다. 매장 곳곳에는 '12월 28일부터 영업을 중단합니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힌 포스터들이 나붙었다.
◆ 가양점 25년, 역사 속으로…주민들 "너무 허전해" 아쉬움
홈플러스 가양점은 지난 2000년 10월 개장한 곳으로, 12월 28일부로 폐점했다. 지난 25년간 서울 강서구 주민들의 일상을 함께 했던 곳이다. 홈플러스 가양점에는 병원과 약국, 의류점, 커피점, 키즈카페, 식당가, 동물병원 등도 입점돼 주민들의 용무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가양동에 거주하는 주민 이영혜씨(41)는 "주말마다 아이들 데리고 나들이하듯 왔던 곳"이라며 "홈플러스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뉴스로 들어보긴 했는데, 폐점을 앞둔 점포가 평소 자주 가던 가양점이라고 하니 마음이 좋지 않다"고 털어놨다.
지하 2층을 내려가니 홈플러스 매장이 등장했다. 주류, 라면, 스낵, 생활용품 등의 매대를 찬찬히 둘러보니 군데군데 비어 있는 공간이 눈에 띄었다. 마치 살을 바르고 난 뒤의 앙상한 생선 뼈를 보는 듯했다. 직원들은 빈 매대가 보일 때마다 제품들을 쉴 새 없이 채우곤 했다. 다만 채우는 물건들도 홈플러스 자체브랜드(PB) 제품들이었다. 이마저도 더는 채울 물건이 없어 매대 뒤에 놓인 제품들을 앞으로 뺄 뿐이었다.
상황이 이렇자 손님들은 직원들에 "짜파게티 안 파나요", "우유 매대에 왜 탄산밖에 없나요" 등 마트에서 어울리지 않을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럴 때면 직원들은 "저희가 이번 주가 마지막이에요", "지금 진열한 제품들이 다예요" 등으로 답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멸치나 생선 등을 판매하는 냉장 매대는 영업 중단을 알리는 고지문과 함께 커튼으로 굳게 쳐져 있었다. 우유나 치즈 등 유제품을 판매하는 코너에서는 유통기한이 상대적으로 긴 탄산음료만 자리했다. 라면 매대는 겨울철 인기가 덜한 비빔면류만 남았다. 스낵 코너에서는 홈플러스 PB 과자들만 일렬로 늘어섰다.
시식 코너는 모두 중단돼 삼겹살이나 만두 등을 굽는 구수한 향기마저 나지 않았다. 이에 직원들의 호객 행위도 멈춰져 있어 적막감만 감돌았다. 매대 앞에 부착된 전표에는 '매진'이라고 적힌 문구만 가득했다. 매장 밖 푸드코트는 '고별세일'이라는 큼지막한 현수막과 함께 이월 옷들만 수북이 쌓였다. 그야말로 휑한 분위기 속 고요한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홈플러스 가양점은 지난 28일 문을 닫았다. 오는 1월까지 동물병원과 키즈카페, 아이스크림 브랜드 매장 세 곳만 운영한다.
매장을 떠나는 주민들은 "이번 주가 마지막이라네", "자주 왔던 곳인데 너무 허전하다" 등의 아쉬움을 남겼다.
◆ 익스프레스(SSM) 분리 매각 꺼낸 홈플러스, 구조조정 불가피
홈플러스는 올해 들어 전방위적 경영난에 처하면서 일부 매장을 계속해서 폐점하고 있다. 실적이 정체된 상황에서 수익성마저 악화하고 있어 파산 위기에 놓였다. 지난해 홈플러스의 연매출(연결 기준)은 6조9920억원으로, 전년 6조9315억원에서 정체돼 있다. 그러나 이 기간 영업손실은 1994억원에서 3142억원, 당기순손실은 5743억원에서 6758억원으로 크게 불었다.
지난해 홈플러스의 총차입금은 2조144억원, 순부채도 1조8757억원을 기록했다. 이를 토대로 홈플러스의 부채비율은 500.2%를 나타냈다. 홈플러스는 재무구조가 악화하면서 종합부동산세와 부가가치세, 전기세 등 공과금 900억원을 미납했다.
홈플러스는 제조사에 내야 할 납품 대금도 제때 정산하지 못하면서 일부 물량 공급이 한때 중단되기도 했다. 이에 홈플러스는 임직원의 12월 급여도 분할 지급했다. 급기야 홈플러스는 폐점을 미뤄왔던 5곳 매장(△서울 가양점 △부산 장림점 △고양 일산점 △수원 원천점 △울산 북구점)의 영업을 연내 종료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주민 박정원씨(37)는 "대형마트 3사 중에 홈플러스가 가격도 저렴하고, 델리 식품 맛도 좋아서 자주 이용했다"라며 "용두점도 최근 폐업해서 홈플러스가 정말 파산에 이르는지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의 주민 황재영씨(34)도 "위메프도 최근 파산했는데, 홈플러스까지 이러니 나라 경제가 말이 아닌 것 같다"라며 "파산 시 수만 명의 근로자가 실직자가 될 텐데 나라도 근로자도 서로 부담이 클 것 같다"고 우려했다.
홈플러스는 지난 3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회생계획안 제출 기한을 다섯 차례나 연장했다. 이 기간 홈플러스는 우선협상대상자를 지정하는 '스토킹호스' 방식으로 매각을 추진했으나, 적당한 인수자를 찾지 못했다. 홈플러스는 지난달 26일 '공개 입찰' 방식으로 매각을 다시 추진했으나, 이 역시도 불발됐다.
홈플러스의 기업가치가 7조원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유통업계 판도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넘어간 만큼 인수자에 부담을 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홈플러스는 현재 하이퍼마켓(대형마트) 120여 곳과 기업형 슈퍼마켓(SSM·홈플러스 익스프레스) 290여 곳을 두고 있다.
홈플러스는 최근 배달앱 쿠팡이츠 퀵커머스에 입점하는 등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신선식품과 델리식품을 중심으로 온·오프라인 서비스를 접목해 고객들에 배송 서비스를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에도 홈플러스의 '골든 타임'은 채 100일이 남지 않았다.
민주노총 소속 홈플러스 마트산업노동조합도 "구조조정과 같은 아픈 과정 역시 밟게 될 가능성을 인정한다"면서 경영진의 부담을 일부 덜어줬다. 그러나 홈플러스 대규모 폐점 조치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대 입장이다.
홈플러스는 전날 서울회생법원에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분리 매각을 담은 자체 회생계획안을 제출했다.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는 홈플러스가 보유한 자산 중 가장 가치 있는 매물이다. 업계에서는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매각가로 7000억원 정도를 보고 있다. 홈플러스는 익스프레스 분리 매각이 인가될 경우 대형마트를 포함해 인수합병(M&A)을 재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다만 홈플러스 최대채권단인 메리츠금융이 홈플러스 SSM 분리 매각에 동의할지는 현재로서 미지수다. 홈플러스에서 SSM 사업부가 분리되면 대형마트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법원은 계획안을 검토한 뒤 채권자들에게 통보하고, 약 한 달간 협의 절차를 거쳐 인가 여부를 결정한다.
홈플러스의 법정관리 기한은 오는 2026년 3월 3일이다. 법원 판단에 따라 6개월 더 연장하게 되면 최장 2026년 9월까지 늘어날 수 있다.
이 기간 홈플러스는 분리 매각을 골자로 한 회생계획안 승인을 위해 채권단을 설득해야 한다. 설득이 되더라도 홈플러스 내 대규모 점포 정리와 구조조정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만약 홈플러스 익스프레스마저 매각이 불발될 시에는 청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홈플러스 측은 "영업 정상화와 기업회생절차의 안정적인 마무리를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tellme@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