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선영 기자] 한국은행 노동조합이 4년 임기를 4개월 앞둔 이창용 총재에 대한 내부 설문 결과를 공개하면서 '이창용의 4년'을 둘러싼 평가가 본격화되고 있다. 물가·금융안정과 한은의 위상 제고, 구조개혁 어젠다 측면에서는 과반 직원이 '우수하다'고 답했지만, 급여·복지·인사 등 내부경영 점수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대외적으로는 구조개혁 메시지와 통화정책 독립성에 높은 점수를 주는 시각과 함께 환율, 주택, 포워드가이던스 발언을 둘러싼 논쟁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내부 설문은 "정책은 우수, 내부경영은 미흡"
한은 노조가 지난달 24일부터 지난 5일까지 조합원 117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이 총재 재임 기간 '전반적인 정책 실적'에 대해 응답자의 61%가 우수하다는 평가(매우 우수 13%)를 내렸다. 보통이 36%였고, 개선 필요 7%, 매우 개선 필요 1%였다. 물가안정 정책 효과에 대해서도 51%가, 금융안정 성과에 대해서는 49%가 긍정적이라고 답해 부정 응답(각각 10%, 9%)을 크게 웃돌았다.
내·외부 위상 제고에 대한 평가는 더 우호적이다. 직원의 64%는 '국내 위상이 높아졌다'고, 62%는 '국제 위상이 높아졌다'고 응답했다. 이 총재가 취임 후 IMF·BIS 인맥과 구조개혁·거시정책 보고서, 국제 콘퍼런스 등을 통해 한은의 존재감을 키웠다는 자평이 내부에도 상당 부분 공유된 셈이다.
반면 급여·복지·인사 등 '내부경영' 항목 점수는 눈에 띄게 낮다. '급여가 개선됐다'는 응답은 29%에 그친 반면, '그렇지 않다'는 답변은 35%였다. 노조는 "지난 5년간 한은 임금 상승률이 4대 시중은행 평균보다 11%포인트 뒤처졌다"며 "3~4급 기준 연봉이 약 3000만원 더 올라야 한다는 게 직원들의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내부 평가는 정책과 위상은 합격점, 조직 안 살림은 미흡에 가깝다. 이 총재 스스로 직원 처우와 내부 소통에 더 신경 쓰겠다고 여러 차례 언급해온 만큼, 남은 임기 동안 내부경영 측면에서 얼마만큼 보완책을 내놓을지가 한은 안팎의 관심사다.
◆ 첫 2년은 '고물가 방화벽', 이후엔 신중한 인하…정책 트랙 평가는
이창용 총재는 2022년 4월 21일 취임해 2026년 4월 20일까지 4년 임기를 맡고 있다. 취임 직후 글로벌 물가 쇼크와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급격한 긴축이 겹치면서, 한은은 기준금리를 연 1.25%에서 3.50%까지 끌어올리는 '역대급 인상기'를 거쳤다.
이후 2023~2024년에는 1년 넘게 동결 기조를 유지하다 2024년 하반기부터 2025년 상반기까지 네 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3.50%에서 2.50%로 내렸다. 연준과의 금리차를 상당 기간 감내하며 긴 동결 구간을 유지했다는 점을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한은 안팎에선 고물가·고환율 국면에서 방화벽 역할을 했다는 평가와 가계부채·내수 충격을 키운 것 아니냐는 비판이 맞섰다.
노조 설문에서 물가·금융안정에 대한 긍정 응답이 과반을 차지한 것은 고물가 국면에서의 선제적인 긴축과 이후 신중한 인하 경로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대체로 '무난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만 시장에서는 미국과의 기준금리 차가 한때 최대 1.75%포인트까지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동결 기조를 유지했던 판단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논쟁이 남아 있다.
◆ '구조개혁 총재' 이미지…메시지는 강했지만, 제도 변화는 과제
이창용 총재를 상징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구조개혁'이다. 그는 취임 첫해부터 연금·노동·교육·주택 시장 등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지적하는 한은 보고서를 잇따라 내며 "지금 구조개혁을 하지 않으면 잠재성장률 2%대도 지키기 어렵다", "정책 당국이 국민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반복해 왔다.
노조 설문에서도 이 총재가 역점을 둔 구조개혁 보고서에 대해 53%가 "중앙은행 위상 제고와 한국 경제정책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됐다"고 답해 다른 정책 영역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외부에선 "한은이 구조개혁을 꾸준히 제기한 것은 의미 있지만, 실제 제도 변화와 연결된 성과는 아직 제한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연금·노동개혁 논의가 정치권 이해관계 속에서 번번이 좌초되는 사이 한은 보고서는 '경고장' 역할에 머물렀다는 지적이다. 보고서의 분석 역량과 메시지에 대한 평가는 높지만, 구조개혁 어젠다를 금융시장의 신뢰·정책 일관성과 어떻게 엮어낼지가 남은 임기 과제로 남아 있다는 해석이다.
◆ 환율·주택·포워드가이던스…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논쟁
이 총재의 리스크 요인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대목은 커뮤니케이션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환율 발언이다. 그는 2024~2025년 국회와 기자간담회에서 "환율이 1500원 근처라고 해서 그 수준 자체가 위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더 중요한 건 변동성"이라는 취지의 설명을 여러 차례 내놨다.
중앙은행 교과서에 가까운 발언이지만, 원·달러가 1500원 안팎까지 치솟은 상황에서 가계·실물경제가 체감하는 부담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금리 인하 시기를 두고 "데이터를 더 보겠다"는 원론적 발언이 반복되면서, 시장이 기대하던 포워드가이던스(향후 금리 경로에 대한 신호)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내부 설문에서 '정책' 항목은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이런 커뮤니케이션 논쟁은 설문 항목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질적 평가 영역이다. 최근 일각에선 이 총재가 임기 말 통화지표(M2) 기준 변경을 추진한 것을 두고 "부동산·통화량 책임론을 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 독립성과 정치적 거리두기…'연임' 논쟁과 별개인 평가
이 총재의 장점으로 꼽히는 부분은 통화정책의 독립성이다. 그는 취임 이후 줄곧 한국은행법이 정한 중립성과 자율성을 지키겠다며 정부의 재정·부동산 정책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여 왔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연임과 관련해 대통령실과 소통한 적이 없다"며 정치권과의 선을 그었고, 차기 선출직 출마 의향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고물가·고금리 국면에서 정부와 여론의 압박이 거셌던 시기를 감안하면, 한은 독립성을 둘러싼 최소한의 '방어선'은 지켰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반면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은이 금리 결정에서 정부와 완전히 다른 시각을 보여준 적은 많지 않았다"며 '제도적 독립성과 실질적 독립성 사이 간극'을 지적하기도 한다. 연임 여부를 둘러싼 잡음이 커질수록 남은 금통위 몇 차례의 메시지가 더 정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도 있다.
시장 안팎에선 내년 4월 임기 만료를 앞둔 이 총재가 남은 기간 어떤 메시지를 낼지 주목하고 있다. 고물가 충격 이후 정상화 단계에 들어선 통화정책의 출구 전략과 함께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역할을 둘러싼 구조개혁 논의, 거시건전성 정책 권한·디지털자산 규율 등 미완의 과제가 한꺼번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정책은 우수하지만 내부 경영은 아쉽다'는 직원들의 평가가 구조개혁 총재의 최종 성적표로 남을지, 아니면 임기 막판 보완 움직임을 통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낼지는 앞으로 4개월 남짓의 시간에 달려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창용 총재는 통화정책만이 아니라 연금·노동·주택 같은 구조개혁 의제를 중앙은행 의제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이전 총재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며 "다만 구조개혁 메시지를 얼마나 실제 제도 변화와 금융시장 신뢰, 통화정책 일관성으로 연결하느냐가 남은 임기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