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여수=고병채 기자] 여수국가산업단지 석유화학 구조조정이 연간 257만 톤 규모의 에틸렌 감산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충남 대산·울산과 함께 국내 3대 석유화학 산단 재편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22일 산업통상자원부와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여수산단 내 여천NCC·롯데케미칼·LG화학·GS칼텍스 등 4개 사가 정부에 제출한 사업재편안에는 에틸렌 생산 능력 기준 최소 257만 톤 감축 방안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과 GS칼텍스가 120만 톤, 여천NCC와 롯데케미칼이 최소 137만 톤을 줄이는 조합으로, 계획대로 진행되면 단일 산단 기준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감산이다.
여수산단은 국내 최대의 나프타분해시설(NCC) 집적지로, 7개 NCC 공장에서 연간 626만 톤의 에틸렌을 생산해 전국 물량의 절반 가까이를 맡고 있다. 이미 여천NCC 3공장(연 47만 톤) 가동 중단과 LG화학 스티렌모노머(SM)·나주 알코올 라인 정지 등 선제 감산이 이뤄진 상황에서 이번 구조조정안이 현실화하면 여수산단의 에틸렌 생산 능력은 최대 3분의 1 가까이 줄어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앞서 8월 석유화학산업 구조 개편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국내 전체 NCC 용량의 18~25%에 해당하는 270만~370만 톤 감축을 연말까지 자율적으로 달성하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사업 재편 계획서 제출 기한은 12월 말이며 연장 계획이 없다"며 시한을 지키지 못할 경우 정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현재 대산산단에서는 롯데케미칼과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케미칼이 HD현대케미칼을 중심으로 공장을 통합하는 재편안을 제출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이 과정에서 롯데케미칼 대산 NCC(연 110만 톤)가 폐쇄될 경우 정부 목표 가운데 110만 톤이 대산에서 감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수와 대산의 계획에 더해 울산까지 재편안을 확정하면 정부 감축 목표치는 사실상 달성된다. 여수 257만 톤, 대산 최대 110만 톤을 합산하면 367만 톤 수준으로, 정부가 제시한 270만~370만 톤 범위의 상단에 근접한다는 분석이다.
울산은 여수·대산과 달리 '과감한 감산'보다 '설비 최적화'에 방점이 찍힌 것이 특징이다. 울산에서는 대한유화(연 90만 톤), SK지오센트릭(66만 톤), 에쓰오일(18만 톤) 등 3개 사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공동 용역을 맡겨 구조조정안을 마련했다. 컨설팅 결과는 SK지오센트릭의 NCC를 폐쇄하고, SK지오센트릭 폴리머 공장은 에쓰오일 또는 대한유화와 조인트벤처(JV)를 통해 공동 경영하는 방식이다. 세 회사가 나란히 소폭 감산하는 대안도 제시됐지만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업계에서 사실상 배제된 것으로 전해졌다.
울산이 상대적으로 몸을 사리는 배경에는 지역 산업 구조가 크게 작용한다. 울산에는 NCC에서 생산되는 에틸렌 등을 원료로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중견기업이 100여 개에 달해 공급 축소가 곧바로 2·3차 협력사와 고용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울산 NCC의 평균 가동률은 90%를 웃도는 수준으로, 여수·대산보다 상대적으로 수요가 견고한 편이다. 다만 에쓰오일의 초대형 투자 프로젝트인 '샤힌 프로젝트'가 완공되면 연간 180만 톤 규모의 추가 물량이 시장에 풀릴 예정이어서 중장기적으로는 울산 역시 과잉 생산 압박을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수는 국내 최대 규모 산단인 만큼 감축 부담도 가장 크다. 여수산단 석유화학업계 종사자는 약 2만 4600명으로, 여수 전체 고용의 42%를 차지한다. 정부가 제시한 감축 목표에 따라 여수산단 7개 NCC 공장 가운데 2~3곳이 구조조정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산단 위기'를 넘어 지역 경제 전반의 '체질 변화'를 요구받는 상황이다.
이미 불황의 그늘은 현장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여수산단 플랜트 건설현장은 대정비 이후 사실상 끊기다시피 하면서 다수의 플랜트 노동자들이 광양·율촌 등 다른 산단으로 이동하거나 실직을 경험했다. 자영업·소상공인 상권도 직격탄이다. 여수산단과 인접한 무선지구와 이순신광장 일대에서는 '임대' 현수막이 눈에 띄게 늘었고, 여수 원도심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전국 평균의 2배 수준인 24%까지 치솟았다.
노동계는 기업 효율성만을 위한 구조조정이 돼서는 안 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화섬식품노조와 여수산단 노동자들은 "석유화학 구조 개편은 수만 명 노동자와 가족, 지역 전체의 생존 문제"라며 노동자가 배제된 일방적 결정이 대규모 해고와 지역 경제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일부 노조는 고용안정협약서의 실효성을 문제 삼으며 "구조조정 과정에 노동자·지역사회가 참여하는 공식 협의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재계와 산업계의 시각은 다소 다르다. 여수상공회의소를 비롯한 경제단체들은 "정부의 NCC 감축 가이드라인은 그동안 외형 확장에만 의존해 온 국내 석유화학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기회"라고 평가하면서도 "여수산단이 전체 감축 목표의 가장 큰 비중을 떠안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세제·규제 특례, 신산업 전환 지원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실제 입법으로 이어졌다. 주철현 국회의원(전남·여수갑)이 대표발의해 지난 3일 국회를 통과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및 산업전환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는 △구조조정 지역에 대한 세제·재정 특례 부여 △친환경·고부가 소재 전환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 체계 마련 △산단 공동 전환펀드(조성사업) 설립 △산업위기 지역 고용안정 대책 의무화 등 노동계·산업계가 요구한 핵심 사안이 모두 담겼다.
특히 이번 특별법은 '감축 이후의 산업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를 국가적 과제로 규정해 여수·대산·울산 등 석유화학 3대 산단의 공동 변화를 뒷받침하는 첫 법적 기반으로 평가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자 보호 장치를 강화하고, 동시에 기업의 신산업 투자를 돕는 2중 안전장치를 갖췄다는 점에서 두 시각의 균형을 반영했다는 평가다.
정부 역시 '선(先) 자구 노력, 후(後) 정부 지원' 원칙을 유지하되, 구조 개편 3대 방향으로 △과잉 설비 감축 △고부가·친환경 제품 전환 △재무 건전성 확보와 지역경제·고용 영향 최소화 등을 제시한 상태다. 여수의 경우 NCC 감축과 함께 탄소중립·친환경 소재, 화이트바이오·배터리 소재 등으로의 포트폴리오 전환이 병행돼야만 '구조조정=쇠락'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결국 여수산단 구조 개편의 성패는 '얼마나 줄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달려 있다. 감산 자체는 대산·울산과 함께 정부 목표를 채우는 수단이지만 그 이후의 산업 재편 방향이 여수 지역 경제의 향방을 가를 핵심 변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쇠퇴를 위기가 아닌 전환의 계기로 만들 수 있을지, 여수산단을 둘러싼 정부·기업·노동계·지역 사회 간 본격적인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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