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이다빈 기자] "12·3 비상계엄 이후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어요."
지난해 12월3일 오후 10시30분께 평범한 직장인이던 박평화(26) 씨는 광주에 사는 삼촌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삼촌은 다급한 목소리로 "계엄이 터졌다는데 뉴스 봤냐"며 "서울과 가까운 네가 당장 국회에 가야 한다"고 했다. 퇴근 후 취미로 하던 악기 레슨을 받고 집에 온 박 씨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 좋아하는 해외 유명 밴드가 10년 만에 내한한다는 소식도 까맣게 잊었다. 무조건 국회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박 씨는 '내 딸을 죽이려고 거길 보내냐'면서 삼촌들에게 화를 내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이어 오후 11시께 경기 광명에서 지하철 막차를 타고 무작정 여의도로 향했다. 그는 "계엄이라는 상황을 믿지 못하면서도 일단 가보자는 마음이었다"며 "계엄이 성공하면 국회 앞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죽게 될 거라는 두려움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자정을 넘긴 시간 박 씨는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에서 내렸다. 수십명의 시민들과 함께였다. 국회 앞에는 이미 철문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시민들이 빽빽히 서 있었다. 롱패딩을 입은 시민들 사이로 형광색 점퍼를 입은 수십명의 경찰이 대치하는 모습도 보였다. 머리 위로는 '두두두두' 굉음을 내며 계엄군의 헬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박 씨는 "계엄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를 연신 따라 외쳤다.
새벽 1시1분 "계엄 해제 요구안 통과됐대"라는 한 시민의 말에도 누구도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국회 주변을 행진하듯 맴돌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를 불렀다. 그렇게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가결 이후에도 박 씨는 시민들과 함께 국회 앞을 지키다 새벽 4시30분이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기억은 박 씨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박 씨는 지금도 헬기 소리만 들리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했다. 평소 헬기 소리를 들을 일이 거의 없어 몰랐지만, 언론 보도를 보고 난 후 그게 헬기였다는 걸 알고 충격은 더 컸다. 박 씨는 "지난 7월 야외 콘서트장에서 방송용 헬기 소리가 들렸는데 마음이 엄청 불안하고 긴장됐다. 콘서트가 아니라 헬기 소리에 온 신경이 다 쏠려 몸이 굳는 느낌이었다"면서 "기억이 불안정하더라도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털어놨다.
12·3 비상계엄은 박 씨를 시민사회단체로 이끌었다. 의류 판매직과 병원 내 일본어 통역 '투잡'을 뛰면서도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촉구 집회에 매일같이 출석했다. 그는 "오전 출근해 일을 마친 뒤 저녁엔 집회 장소로 가는 일정을 소화했다. 매일 출근을 두 번 하는 느낌이었다"면서 "체력적으로 힘들었는데, '집회에 안 가야겠다'가 아니라 '퇴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매일 집회에 출근하며 힘을 보태고 싶어졌다. SNS에 올라온 자원봉사자 모집글을 보자 주저 없이 신청서를 냈다. 이후 3월부터는 자원봉사자로 집회에 나섰다. 집회 진행 과정 전반에 참여하며 자연스럽게 시민운동에 동참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결국 박 씨는 5월 퇴사했다. 본격적으로 시민사회 활동가로 변신한 것이다. 현재는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 기록기념위원회 사무국원으로서 기자회견 준비, 집회 자료 수집 등 실무를 맡고 있다.
그는 "집회 현장에 나가 다른 활동가들을 만나고 지켜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떻게 하면 활동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자연스레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시민사회운동을 업으로 삼겠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하다가 집회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길이 트였다"며 "그동안은 이직을 하더라도 연봉이나 시급 같은 돈 계산만 했는데, 이제는 돈만 따라가지 말고 나에게 맞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박 씨는 지난해 11월 이름을 '평화'로 개명했다. 계엄 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이었다. 본래 이름은 지영이었지만, 어머니 동의 없이 아버지와 할머니가 지은 이름이었다. "태명이라도 '평화'로 지을 걸"이라며 아쉬워하는 어머니의 말이 마음에 걸려 박 씨는 결국 이름을 바꿨다.
그의 이름은 평평할 평(坪)과 화할 화(和). 안정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라는 뜻이라고 한다. 평화라는 말 그대로의 뜻도 있지만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단다. 박 씨는 "누군가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며 "기회가 된다면 어느 단체에 소속되든 시민단체 활동가로서의 길을 계속 걷고 싶다"고 강조했다.
집회는 그가 세계를 만나는 시공간이다. 그 곳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발언을 한다. 평소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던 문제가 자신 주변의 일이었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준다.
이제 그에게는 작지만 큰 바람이 생겼다.
"좀 더 이타적이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