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신진환 기자]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가 나라의 법률을 제정하고 개정하는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이나 헌법불합치 판단에 따라 필요한 법률 정비에 미온적이다. 법은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며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국회가 무책임하게 국민의 권익을 침해하고 있는 셈이다. 입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깊은 상황에서 입법 공백을 방치하는 국회의 반복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상임위원회별 개정 대상 법률은 지난달 25일 기준 모두 29개다. 이 가운데 위헌은 16건, 헌법불합치는 13개다. '위헌'은 말 그대로 최상위법이자 근본 규범인 헌법을 위반한 것이다. '헌법불합치'는 해당 법률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도 당장 위헌 선언을 할 때 법적 공백을 우려해 개정에 필요한 일정 기간 내 법 조항의 효력을 유지하는 결정을 말한다. 사회적 혼란을 우려해 법 개정 때까지 한시적인 조치일뿐 법 조항의 효력 자체를 인정하는 건 아니다.
◆개정 대상 법률 정비 하세월…개정 시한도 '훌쩍'
상임위별로 살펴보면, 법제사법위원회는 헌재의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법률 13개(위헌 7개, 헌법불합치 6개)를 개정해야 한다. 특히 헌법불합치 결정 법률 4개는 개정 시한이 지났다. 여성의 낙태와 이를 도운 의료인을 처벌하는 형법, 보호관찰처분 대상자에게 무기한 변동신고 의무를 지우는 보호관찰법, 8촌 이내 혈족 사이의 혼인을 일률적으로 혼인 무효사유로 규정한 민법, 혼외자 생부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도록 한 과족관계등록법이다.
2020년 12월 31일까지의 개정 시한이 지난 낙태죄는 무려 5년이나 입법 공백 상태다. 22대 국회에서 내내 발의조차 안 되다 지난 7일 조배숙 국민의힘 의원이 형법상 낙태죄 조항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패키지로 대표발의했다. 아직 상임위 차원에서 해당 법안에 대한 논의는 한차례도 없었다. 내년도 예산안 심사 등 영향으로 보인다. 나머지 헌법불합치의 민법·가족관계등록법 개정안은 상임위에 계류 중이고, 보호관찰법 개정안은 단 한 건도 발의되지 않았다.
심지어 23년이 넘도록 방치된 법률도 있다. 찬양·고무죄 피의자의 구속 기간을 최대 50일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국가보안법 19조다. 헌재는 1992년 4월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을 결정했다. 2002년 11월 위헌 판정을 받은 찬양·고무죄 등의 재범에 대한 법정 최고형을 사형으로 규정한 국보법 13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발의된 관련 개정안이 없다. 한 야당 중진 법사위원은 <더팩트>와 통화에서 "미쳐 못 챙겨봐 송구하다"라며 "상임위 차원에서 빨리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법사위 다음으로 개정 대상 법률이 많은 행정안전위원회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과 국민투표법 개정을 과제로 안고 있다. 집시법 관련해선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옥외집회를 금지한 제10조와 대통령 관저 및 국회의장 공관 100미터 이내 집회를 금지한 제11조 모두 개정 시한이 지났다. 10조는 무려 15년 5개월, 11조는 1년 6개월 동안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다만, 법률을 정비하기 위한 관련 법들이 소위에서 논의 단계에 있다.
2014년 7월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국민투표법은 11년째 방치되고 있다. 헌재는 국내에 거소를 신고한 재외국민만을 명부에 포함하도록 규정한 14조 1항에 대해 거소를 신고하지 않은 재외국민의 투표권을 침해한다고 판단하면서 2015년까지 개정을 요구했다. 현재까지도 법률은 개정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공직선거와 국민투표를 동시에 할 수 없다. 개헌 필요성에 공감하는 여야가 정작 개헌의 걸림돌을 계속 놔두는 모순적 태도를 보인 탓이다.
이 외에도 국민투표법상 사전투표가 허용되지 않아 유권자들은 헌법 개정안에 대한 투표를 본투표일에만 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국민투표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원식 국회의장 역시 국민투표법을 시급히 손을 봐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지난 4월 재외국민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투표권을 보장하고 공직선거법상 국민투표권자를 헌법의 국민투표권자와 일치시키는 법안이 여야 모두에서 발의된 상태다.
그런데 소관위 심사 단계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다. 일부 법안이 지난 18일 행안위 법안심사2소위에 상정된 점은 주목된다. 국민투표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권향엽 민주당 의원은 통화에서 "입법 불비 사항이라 반드시 보완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향후 여야가 본격적으로 개헌을 논의할 때 국민투표법 개정 논의도 이뤄질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여야가 적극적으로 개헌 논의에 나서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붙는데, 현재는 국회 개헌특위도 구성되지 않은 상황이다.
◆국회의 '직무 유기'…법 개정 강제성도 없어
'일하는 국회'를 다짐했던 22대 국회는 위헌성이 인정된 법률을 헌법에 합치되도록 정비하는 것에 소홀하다. 이유는 간명하다.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보다 정쟁에 치우치는 영향이 크다. 또한, 여야는 일반적으로 '표'와 '지지율'과 직결된 대형 이슈에, 개별 의원은 본인 또는 지역구와 이해가 얽힌 현안의 입법화에 무게를 두고 있어서다. 접촉한 여야 의원들은 "살펴보겠다" "잘 모르겠다"라는 말만 내놨다. 실적이 저조한 이번 국회에서도 위헌 법률 정비 여부 자체가 불투명하다.
국회 법제실에 따르면 역대 국회별로 위헌과 헌법불합치 법률을 정비한 건수는 △13대 국회 12건 △14대 26건 △15대 72건 △16대·17대 75건 △18대 157건 △19대 83건 △20대 95건이다. 직전 21대 국회는 임기 4년 동안 총 95건의 법률조항을 개정했다. 위헌 결정 52건, 헌법불합치 결정 43건이다. 지난해 5월 30일부터 임기를 시작한 22대 국회는 1년 반 동안 같은 기준으로 총 18건을 정비하는 데 그쳤다.
세부적으로 법사위는 헌재의 위헌판정을 받았던 민법상 피상속인 형제자매의 유류분 규정을 삭제했고, 지방출입국·외국인관서로부터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외국인에 대한 보호기간의 상한을 신설하는 출입국관리법을 보완했다. 복지위는 의료인이 임신 32주 전 태아의 성별을 임부 등에게 알리는 것을 금지하는 의료법 규정을 손질했고, 행안위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적 학대 또는 음란물소지죄로 형이 확정된 국가·지방공무원의 임용결격사유를 영구에서 20년으로 완화했다.
헌법 정신과 취지에 맞지 않는 일부 법률의 내용을 그대로 두는 건 명백한 국회의 '직무 유기'다. 헌법 존중의 정신이 실종됐다. 유성진 이화여대 교수(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소장)는 문자메시지로 "너무나 무책임한 행태"라며 "그 책임은 국회운영의 압도적 영향력을 가진 기득권 두 정당(민주당·국민의힘)이 져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여론 환기를 통해 국회가 위헌 취지에 맞게 개정 입법에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촉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헌재의 입법 개정의 권고 자체는 법적 강제성이 없기에 절반 이상 남은 임기를 정쟁으로 허비한다면 남은 29개의 법안 정비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다수의 개정안은 타협안을 찾지 못하거나 임기 만료 등을 이유로 자동 폐기됐던 전례가 수두룩하다. 법령 개정의 책임이 있는 행정부도 관망세다. 더군다나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여야가 정치적 민감도가 낮은 위헌성 법률을 정비하는 데 적극 나설 가능성은 낮다.
결국 국회가 위헌성 법안 제·개정에 강제성을 부여하는 자구 방안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통화에서 "현재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다수당인 민주당이 위헌성 법률을 놔두더라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면서 "강제적인 법률이 없다면 국회는 무조건 위헌성 법 조항을 뜯어고치려는 논의조차 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에 향후 지방선거 이후 정치개혁을 논의할 때라도 이 부분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민주당 등 범여권에서 내란 재판 지연과 신뢰성을 의심하며 조희대 대법원장과 사법부에 대한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사법부와 별도로 헌법재판을 담당하는 독립기관인 헌재의 입법 보완 권고를 방치하는 입법부가 사법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질책하는 건 국민의 눈높이와 맞지 않는다. 심지어 국회가 당연히 입법해야 할 사항을 입법하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도 헌법소원 대상이다.
유구무언의 입법부는 법 개정에 일정한 유예기간을 두는 헌재의 취지를 새길 필요가 있다. "최고법규로 하는 통일적인 법질서의 형성을 위해 필요할 뿐 아니라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해 전면 폐기하기보다는 그 효력을 가급적 유지하는 것이 권력분립에 의한 정신에 합치하고 민주주의적 입법 기능을 최대한 존중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90헌가11)." "그것은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입법형성권을 가지는 국회의 정직성·성실성·전문성에 대한 예우이고 배려라고 할 것이다(91헌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