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우탁 칼럼니스트] "저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를 각하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019년 8월 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김 위원장은 이어 "실무급 양자 협상을 앞두고 도발적인 연합 군사훈련이 취소 또는 연기될 것으로 믿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분이 상한 이유’를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022년 9월 한미클럽 발간 '한미저널'에서)
주목할 점은 친서를 보낸 시기이고, 핵심은 한미연합훈련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친서를 보낸 시점은 이른바 ‘하노이 노딜’로 끝난 2차 미북 정상회담 이후 협상기류를 이어가기 위해 그해 6월 30일 판문점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그리고 문재인 한국 대통령이 회동한 뒤였다.
또 김정은 친서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도 두 차례에 걸쳐 김정은에게 친서를 보냈다. 그 친서에는 자신과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장면을 담은 사진도 있었다. 김정은은 "사진을 받아 기뻤다. 지금 내 집무실에 걸려 있다. 감사하고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했지만 그해 8월 예정된 한미연합훈련이 취소되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문제삼은 것이다.
이후 김정은은 스웨덴에서 진행된 미국과의 실무협상(2019년 10월5일)을 결렬시켰고, 이후로도 트럼프와의 비핵화 협상의 문을 닫아버렸다. 심지어 2020년 6월에는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한미연합휸련은 북한이 크게 집착하는 이슈였고, 협상이냐, 파국이냐를 가늠하는 관건적 사안으로 부각됐었다.
실제로 2018년 1월 4일 문재인-트럼프 전화통화를 통해 한미 양국이 정례 연합훈련이던 '키 리졸브·독수리 연습'을 연기하겠다고 밝혔고, 김정은 위원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와 남북, 미북 대화에 나서는 요인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한미연합훈련이 다시 핵심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경주 APEC(아태경제협력체)을 계기로 ‘트럼프-김정은 회동’이 성사되길 기대했던 한국 정부측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3일(현지시각)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에서 한미 연합훈련을 '북한이 가장 예민해하는 것'이라며 훈련 조정이 "상황 변화의 지렛대가 될 수도 있고, (상황 변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신중한 태도이지만 정부가 한미연합훈련을 중요한 대북 조치의 일환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직후부터 정부 일각에서 한미연합훈련 조정 필요성은 거론돼왔다. 특히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인사청문회에서 한미연합훈련의 ‘훈련 연기’ 또는 중단 여부를 논의해야할 사안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에도 한미연합훈련의 ‘톤의 조정’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는 뜻도 피력했다.
이제 관심은 북한의 반응에 쏠린다. 과거 2018년 때처럼 한미연합훈련의 연기 또는 조정이 현실화될 경우 북한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놓고 다양한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지난 23일 케빈 김 신임 주한 미국 대사대리와 만난 자리에서 경주 APEC을 계기로 북미 대화를 열어갈 ‘기회의 창’이 열렸다면서 내년 4월로 예정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 정부가 북미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페이스메이커’로서 노력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한미연합훈련의 축소 또는 조정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일부 전문가들도 한국 정부의 움직임, 그리고 여전히 김정은 위원장과의 회동을 강력히 희망하는 트럼프의 의지 등을 토대로 내년 상반기중 기류 변화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인 기류는 부정적이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와의 강한 밀착을 통해 전략적 입지를 다져왔다. 또 최근 전승절 80주년을 기념하는 중국군 열병식 참관을 위해 시진핑 주석과 함께 톈안먼 망루에 오른 김정은 위원장은 ‘북중러 3각 연대’를 강화하는 행보에 주력하고 있다.
아울러 이미 고도화된 핵무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핵보유국을 자처하며 비핵화 협상을 완강히 거부하는 북한이다. 결국 7년 전과 달라진 북한의 국가전략을 감안할 때 한미연합훈련을 카드로 사용하는 것이 과연 한국의 안보상황에서 유효한 지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실제로 북한의 대외매체 조선중앙통신은 28일 논평에서 한미 간 군사 협력 등을 거론하며 "조선반도와 주변 지역의 전략적 안정을 엄중히 위협하며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미국의 무모한 군사적 준동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까지도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북한의 달라진 전략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할 경우 자칫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국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