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강일홍 기자] 벌써 11월 중순, 2025년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각종 사건사고 속에 공영방송 KBS는 또다시 국민 신뢰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지난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한모 전 KBS 예능센터장의 '출연 청탁 의혹'은 단순한 개인 일탈로 보기 어렵습니다. 정권과 정치권력, 외부 이해관계가 공영방송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민주당 김우영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한 전 센터장은 '쌍방울 대북송금 사건' 관련 브로커로 알려진 사업가 조모 씨의 권유를 받아 코인 투자를 했고, 이후 조 씨로부터 특정 프로그램 출연 청탁을 받았습니다.
국감장에서 공개된 문자 메시지는 도저히 공영방송 간부가 주고받을 수준이 아닙니다. '야 00야 부탁해', '고마워 아우야' 등 반말을 섞은 친근한 어투 속에, '코인투자 1000만원', '의리와 충성단결'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합니다. 30년 넘게 방송 PD로 근무한 KBS 간부가 연예 매니저 출신 사업가와 이런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습을 떠올리면, 부끄럽다 못해 자괴감마저 들 정도입니다.
◆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 개인 일탈 아닌 KBS의 '구조적 취약성'
더 충격적인 건, 모 트로트 가수가 이 청탁에 실제로 연루됐다는 사실입니다. 가수 G는 빅히트곡이 없어 대중적 인지도가 낮지만, 작곡을 많이 해 신인가수들 사이에서 싱어송라이터로 잘 알려진 인물인데요. 그는 출연 청탁논란에 휘말린 뒤 "선거 홍보송 문제로 조 회장님을 처음 만났고, 이후 '방송에 출연하고 싶으면 뭐든 말하라'고 해서 '가요무대'와 '전국노래자랑'에 각각 한 차례 나갔다"고 털어놨습니다.
이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공영방송 출연이 공식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사적 접촉과 은밀한 청탁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인데요. 이에 대해 한 전 센터장은 국감에서 "(방송출연 문제가) 부당하게 이뤄진 건 아니다. 친한 선배로서 자연스러운 부탁이었다"고 변명했지만, 공정성과 투명성을 생명으로 삼아야 할 KBS가, 고위 간부 한 사람의 편의와 외부 인사와의 친분에 의해 좌지우지된 셈입니다.
이는 애초 공영방송 간부가 가져야 할 원칙 의식과 책임감과는 거리가 멉니다. 공영방송의 의사결정이 이렇게 사적 인간관계와 충성심, 심지어 금전 거래와 얽혀 있다면, 국민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박장범 KBS 사장은 국감에 출석해 "감사가 진행 중이고, 사실 확인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했는데요. KBS는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한 듯 한 전 센터장을 국감 직후 곧바로 보직 해임시켰습니다.
◆ 정권과 외부 이해관계 차단, 독립 편성과 투명한 내부 절차 절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조직 내 한 개인의 실수나 일탈이 아니라,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KBS의 구조적 취약성입니다. 공영방송 KBS가 권력과 이해관계에 얼마나 취약한지, 내부 통제 장치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국민 세금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특정 사업가와의 개인적 친분과 사적 거래로 흔들린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돌아갑니다.
정권과 정치권력의 입김이 교체기마다 방송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 그리고 고위 간부가 사적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현실은 공영방송의 구조적 문제로 꼽힙니다. KBS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출연 결정과 편성, 내부 감시 체계 전반에 대한 근본적 재점검을 해야 합니다. 출연 청탁과 권력 결탁이라는 불명예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한, 공영방송의 위상 회복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합니다.
아시다시피 공영방송 KBS는 국민의 신뢰 위에 세워진 기관입니다. 이번 논란은 내부 고위직의 도덕성과 책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극명하게 보여줬습니다. 이제는 변명이나 사후 감사로 덮을 일이 아닙니다. KBS가 다시 국민의 신뢰를 얻고 싶다면, 정권과 외부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편성과 투명한 내부 절차를 만들어야 합니다. 철저한 시스템 개선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만이 공영방송의 본래 역할을 지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