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조채원 기자] 고교학점제 개선안이 국가교육위원회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현재 고1 학생들이 받는 '조기 진로선택 압박'을 해소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어떤 과목을 선택하느냐가 내신성적 뿐 아니라 대학과 학과 지원에도 영향을 미치는 구조 때문이다. 결국 적성·흥미와 무관하게 '등급이 잘 나올 과목'으로 선택이 쏠릴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5일 교육계에 따르면 국교위에서 고교학점제 개선안은 미이수제 적용 범위 위주로 논의 중이다. 현장 교사들은 40% 이상의 학업성취율, 3분의 2 이상의 출석률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현행 학점이수 기준에 대해 '업무부담 가중'을 호소해왔다. 차정인 국가교육위원장은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 고교학점제 개선안에 대해 "본래 취지를 살리면서 혼란을 최소화하고 제도가 안착할 수 있는 묘안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라며 "12월 중에는 개선안을 내놓겠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서 나오는 원점 재검토 또는 폐지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런 선택이 있겠느냐"고 선을 그었다.
다만 교원들의 업부부담과 다른 이유로 현 고1 학생들의 불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각 대학이 지정한 핵심·권장과목을 선택하지 않거나 성적이 안 좋을 경우 선택지가 크게 좁아져서다. 종로학원이 발표한 '2028 서울 주요 10개대 고교학점제 전공연계 지정과목 분석'에 따르면 자연계의 경우 수학·과학에서 대학 내 학과별, 대학 별로 제각각이다. 핵심과목은 해당 학과(부)에서 공부하기 위해 필수 이수, 권장과목은 가급적 이수를 권장하는 과목이지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둘다 필수요건이라고 봐야 한다. 인문계열에서 고교학점제와 연계된 핵심 및 권장 지정과목은 사실상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수학은 핵심·권장과목으로 기하와 미적분Ⅱ를 모두 보거나, 둘 중 한 개는 반드시 보거나, 아예 보지 않는 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서울대 대부분 자연계 학과는 기하와 미적분Ⅱ를 핵심·권장과목으로 지정했지만 고려대는 학과에 따라 기하만 보거나 지정과목이 없는 식이다. 고려대 지원 요건만 갖춘 학생은 서울대를 지원할 수 없다.
여기에 과학과목 선택까지 겹쳐지면 더 복잡하다. 예를 들어 고려대 건축학과는 핵심과목 없이 권장과목으로 미적분Ⅱ를 본다. 그러나 경희대 건축공학과는 핵심과목으로 대수·미적분I·확률과 통계·미적분Ⅱ를, 권장과목은 기하·물리학을 지정했다. 경희대 지원 요건을 갖춘 학생은 고려대를 지원할 수 있지만 반대인 경우는 어렵다. 원하는 학과를 빨리 정해야 '선택과목 로드맵'을 짜고, 대학입시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구조다.
문제는 현행 고 1들이 2학년 때 들을 과목 선택이 주로 1학년 2학기(보통 10~12월 경)에 이뤄진다는 점이다. 진로를 충분히 고민하거나 공부할 기회조차 없이 '진로선택 압박'에 내몰리는 것이다. '진로와 적성에 맞게 듣고 싶은 과목의 학점을 이수해 학생 개개인 성장과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고교학점제의 취지가 희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고1에 자기 진로에 확신을 갖는 학생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불확실성에 대비해 과목 선택에서 진로·적성보다 일단 내신을 잘 딸 수 있는 과목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할 수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최선정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도 "학교 현장에서 고교학점제에 대한 불안은 불만, 스트레스를 넘어 체념에 가까운 상태"라며 "진로진학 상담을 강화한들 내신 상대평가 제도 하에서 고교학점제 운영은 대학입시에 종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활발히 시행 중인 전공자율선택제도(무전공 제도)와 모순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무전공 제도는 대학 1학년을 마친 뒤 2학년부터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전공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전공 선택권 확대와 융합형 인재 양성이라는 정부 정책 기조를 반영해 확산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는 빠른 진로 선택을 요구하면서 대학에 들어와서는 '신중한 선택'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조차도 개인별 맞춤형 학습보다는 상위등급 획득을 위한 과목 선택으로 귀결된다.
임 대표는 "무전공 선발 전형은 정시 기준으로 봤을 때 70~80%가 이과로, 수능에서 미적분 또는 기하를 선택한 상위권 학생들"이라며 "전공 연계성이 떨어지는 학과 특성, 합격 점수를 공시해야 하는 대학의 입장에선 수시에선 인문·자연계열을 막론하고 등급이 높은 학생 위주로 선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