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 이우탁 칼럼니스트] 6년 전 당한 ‘하노이의 수모’를 설욕할 것인가, 아니면 ‘트럼프의 구애’에 호응할 것인가.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참석차 한국 방문을 코 앞에 두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만나고 싶다’는 구애의 손짓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 세계인의 시선은 ‘김정은의 선택’에 쏠리고 있다.
우선 트럼프의 메시지는 갈수록 강해지는 양상이다. 그는 27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일본 도쿄로 향하는 기내 간담회에서 김 위원장과의 회동 가능성에 대해 "그가 만나고 싶어한다면 나도 그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특히 "나는 한국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곳(북한)으로 바로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정상회동 제안에 응하면 직접 북한을 방문할 수 있다고 밝힌 것이다.
김 위원장이 야심차게 개발한 해안관광지구가 있는 원산갈마지구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트럼프는 더 나아가 대북 제재 완화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할 수 있느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우리에겐 제재가 있다. 그건 (대화를) 시작하기엔 꽤 큰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북한을 "일종의 핵무기 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부른 바 있다. 북한이 요구하는 ‘핵보유국 인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북한측 사정을 충분히 배려한 표현이다. 이렇게 보면 트럼프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직접 판문점을 넘어 북한 땅으로 갈 수도 있고, 또 북한이 요구해온 대북 제재 카드도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제스쳐를 취한 셈이다.
김정은의 마음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북한쪽에서는 아직까지 별 반응이 없다. 오히려 트럼프의 구애 메시지가 전해진 27일 최선희 북한 외무상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은 "북·러관계가 계획대로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일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을 결심했다면 통상 정상회담에는 외무상이 배석한다는 점에서 최선희의 러시아 방문은 트럼프와의 회동을 우회적으로 거부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6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임을 알 수 있다.
2019년 6월 29일 오전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친 뒤 방한하기 직전 트위터에 "김 위원장이 이것을 본다면 비무장지대(DMZ)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고, 북한이 즉각 호응하자 이튿날인 6월30일 판문점에서 트럼프-김정은 깜짝회동이 성사됐었다.
전문가들은 이 대목에서 ‘하노이의 굴욕’과 그 이후 달라진 김정은의 국가전략을 중시한다. 6년 전 2차 미북 정상회담을 위해 자신의 전용열차를 타고 중국 대륙을 가로 질러 머나먼 베트남 하노이까지 가서 트럼프를 만났던 김정은은 회담 첫날 성과를 낙관했었다. 2019년 2월28일 오전 트럼프와의 단독회담을 하면서 김정은은 취재진에게 "나의 직감으로 보면 좋은 결과가 생길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영변 핵시설 해체를 고리로 미국의 대북 제재 해제를 끌어내는 과감한 딜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 정보 당국이 파악한 '영변 이외의 5곳'의 핵시설 리스트를 제시하며 "모두 해체하라"고 요구했다. 김 위원장이 "영변이 가장 큰 시설"이라고 말하자 김정은을 향해 "협상을 할 준비가 안됐다"고 선언한 뒤 일방적으로 협상장을 나가고 말았다. 협상이 결렬 위기에 처하자 북한은 이른바 ‘스냅백(합의한 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제재를 다시 부과하는) 카드’까지 제시하며 미측에 매달렸지만 그것도 거부당했다. 이른바 '하노이 노딜'은 ‘최고존엄’ 김정은에게 큰 충격을 줬다.
미중 패권경쟁 구도 속에서 전략적 행보를 하려던 김 위원장은 이후 미국과의 담판을 포기하고 중국과의 연대에 총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핵무력 고도화의 길로 질주해 사실상 ‘핵무력 국가’를 자처하게 된다. 하노이의 굴욕 이후 열린 2021년 1월 북한 노동당 8차 당대회 보고에서 김정은은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이라는 실체와 대조선정책의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그리고 2022년 9월 북한은 핵무기 선제타격을 가능하게 하는 핵보유국법을 채택했다. 이후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와 함께 미국에 맞서는 '강 대 강 '대결의 길로 나아갔다. 지난달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김정은은 "제재 풀기에 집착하여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맞바꾸는 것과 같은 협상 따위는 없을 것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6년 전에 자신이 간절하게 요구했던 대북 제재 해제는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사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 편에 확고하게 서면서 새로운 제재 부과는 어렵게 됐다. 아울러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지원한 대가로 식량과 에너지 등의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6년 전처럼 제재 완화에 매달리지 않아도 될 상황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6년 전과 달라진 국제질서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이 벌이는 패권경쟁은 러시아의 가세 속에 갈수록 양상이 복잡해지면서 미국의 주도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와 연대의 손을 확실히 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분석이다. 어쩌면 트럼프의 구애를 거절하면 김정은으로서는 ‘하노이의 복수’를 하는 효과도 노릴 수 있는 국면이다.
하지만 트럼프와 ‘여전히 좋은 추억’을 강조하는 김정은을 보면 무작정 트럼프의 구애를 외면하기도 쉽지 않다. 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에 ‘견딜수 없는 수모’를 안길 경우 받을 후폭풍도 생각해야 한다.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평양의 신호’를 지켜보는 시간이다. 이래저래 세계인의 시선이 한반도로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