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사 자사주 EB 발행 '러시'…소각 의무화 대비 '꼼수'?


발행사 중 70% 공시 후 주가 하락
금감원, '깜깜이 EB 발행' 지적…공시 기준 강화
3차 상법개정안 공개 전 막차 몰릴 가능성도

1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상장사의 자사주 EB 발행을 기업가치 제고 목적이 아닌 자사주 소각 의무화에 대비한 꼼수로 지적하는 분위기가 시장에 깔리고 있다. /더팩트 DB

[더팩트|이한림 기자] 국내 상장사들이 최근 자사주를 활용한 교환사채(EB) 발행 횟수를 늘리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정부의 자사주 소각 의무 법제화 움직임에 대비하고, 보유 중인 자사주를 최대한 활용해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다만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기업들의 자사주 EB 발행을 '꼼수'로 인식하는 분위기도 깔려 있다. 자사주 대상 EB 발행을 공시한 상장사 중 절반 이상의 상장사가 다음날 주가 하락을 기록하면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노력 의지가 사실상 없는 게 아니냐는 질타까지 나온다.

국회 정무위 소속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자사주 대상 EB 발행 신고 건수는 47건을 기록했다. 지난해 28건, 2023년 25건에 비하면 급증한 수치다. 자사주를 활용한 EB 발행 규모도 지난해 총 1조원(9863억원)을 넘기지 못했으나 올해 2조원(2조375억원)대로 2배 이상 폭등했다.

기업별로는 넥센, 대교, 덕성, 삼호개발, 비에이치, DB하이텍 등이 해당한다. 이들은 올해 하반기 모두 자사주 EB 발행 결정을 공시했으나 공시 직후 주가는 하락했다. 쿠쿠홈시스, 쿠쿠전자 등을 자회사로 보유한 지주사 쿠쿠홀딩스의 경우 지난달 16일 자사주 6.5%를 EB 발행으로 공시한 후 5거래일 연속 하락해 우려를 키우기도 했다.

이에 시장에서는 기업들의 올해 EB 발행 확대를 정부가 추진하고 국회가 논의 중인 1년 내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과 연관해 보고 있다. EB는 일정 기간 후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붙은 채권으로, 보유 중인 자사주를 채권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향후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더라도 법적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해석이다.

소액주주들의 불만도 치솟고 있다. 자사주 EB 발행을 단행한 상장사의 소액주주들은 종목토론방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주주행동 플랫폼 등을 통해 자사주 소각을 피하려는 기업들이 EB 발행을 연이어 서두르면서 주가가 부정적으로 반응해 주주가치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16일 금감원에 따르면 오는 20일부터 기업들의 자사주 EB 발행 공시 작성 기준을 강화한다. /더팩트 DB

당국도 이를 인지한 분위기다. 금융감독원(금감원)에 따르면 지난달 자사주 EB 발행 결정을 최초 공시한 36개사 중 70%에 달하는 25개사가 다음 거래일 주가 하락을 맞았다. 이에 자사주 EB 발행에 대한 공시 기준을 강화해 상장사의 자사주 활용에 대해 살펴보겠다는 방침이다. 공시 강화를 통해 자사주 EB 발행 결정이 주주이익에 미치는 영향 등 주요 정보를 상세히 기재하도록 공시 작성 기준을 개정하고 20일부터 시행하는 형태다.

금감원 관계자는 "기업이 주주 충실 의무에 따라 주주 관점에서 더 신중하게 교환사채 발행을 검토하도록 하는 등 주주 중심 경영 활동 정립을 유도할 것"이라며 "투자에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교환사채 발행에 대한 시장의 냉정한 판단과 평가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상장사의 무분별한 자사주 EB 발행 사례가 더 늘어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시장이 상장사의 자사주 EB 발행 행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면서 KCC 등 실제로 EB 발행을 계획했다가 철회한 상장사도 나오고 있으나,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들은 소각 의무화가 통과되면 선택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자사주를 이용해 EB를 발행한다고 해서 모두 흥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코스피 지수가 사상 최고치를 연이어 경신하면서 자산운용사들이 기업이 발행한 EB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판을 키우는 측면도 있다"면서도 "당국이 공시 작성 기준을 강화하고 여론도 악화해 최근 EB 발행이 위축되긴 했으나, 당정의 자사주 소각 등이 담긴 3차 상법개정안 공개가 임박해 막차라고 생각하고 발행을 늘리거나 계획을 고수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2kun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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