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강일홍 기자] 누구나 한번은 떠난다. 한국 코미디의 산 역사이자 웃음의 아이콘이던 전유성,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내 묘비명은 '웃지 마, 너도 곧 와'로 해달라"고 했다는 얘기나 임종 직전 후배들에게 "울지마, 나 이제 간다, 뒤를 부탁한다"고 한 의연함은 죽음에 임박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머로 승화시키려 했던 삶의 철학이자 해학이었다. 전유성을 둘러싼 코미디 관련 일화들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돼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준다.
1969년 TBC 방송작가로 출발한 전유성은 곧 개그맨으로 전향했다. 작가 시절부터 남달랐던 그의 개그 감각은 카메라 앞에서 더욱 빛났다. '좋은 친구들' '웃으면 복이 와요' '유머 1번지' '우리말 겨루기' 등 당대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마다 그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단순한 재담꾼을 넘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쏟아내며 흐름을 이끌었던 그는, 동시대 개그맨들에게는 '아이디어 뱅크'이자 '웃음 창고'였다.
그의 유머는 단순한 말장난이나 과장된 행동에 머무르지 않았다. 사회적 풍자를 담되 날카롭지 않고, 일상 속 사소한 관찰을 해학으로 빚어내 대중이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만들었다. 시대의 공기를 읽고 웃음으로 녹여내는 감각은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전유성만의 영역이었다. 스스로 화려한 인기 스포트라이트를 좆지 않으려 했고, 일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후배들을 위해 항상 뒤로 한 발 물러서 있었다.
◆ 후배들의 스승이자 존경받는 선배, 대중에겐 남긴 깊은 울림
전유성은 예능계의 주류에서 벗어나도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었다. 명예나 인기보다 그가 택한 건 '웃음' 그 자체였다. 이 때문에 전유성의 행보는 늘 예측 불가였다. 남들이 기피하는 무대, 혹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포맷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는 '웃음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창작의 즐거움이 우선이었다. 이는 후배들에게도 가장 큰 울림을 줬다. 코미디는 결국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이며, 그 순수한 본질 앞에서 명예나 물질적 욕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전유성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자 가장 크게 슬퍼한 건 바로 후배 개그맨들이었다. 후배들은 '가장 존경하는 선배' '우리 개그맨들의 스승'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남긴 수많은 조언과 따뜻한 격려는 후배들의 인생과 개그 인생을 동시에 바꿔놨다. 그의 조언은 짧고 단순했지만, 그만큼 울림이 컸다. "웃음은 계산하는 순간 힘을 잃는다", "먼저 즐거워야 남도 즐겁다"는 말은 코미디라는 장르가 지닌 본질을 꿰뚫은 가르침이었다.
◆ 명예나 인기보다 웃음 선택한 삶, 기발한 착상 아이디어뱅크
전유성의 유머는 세대를 초월했다. 기성세대는 그를 통해 유년 시절의 웃음을 떠올렸고, 젊은 세대는 그의 작품에서 '옛 개그의 품격'을 배웠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건 화려한 타이틀이나 수상 경력이 아니라, 텔레비전 앞에서 배꼽을 잡고 웃던 추억이었다. 병상에서도 농담을 던지며 주위 사람들을 웃게 한 것도,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한 유유자적의 인생관을 말해준다.
특히 그는 일평생 '웃음은 삶을 가볍게 만드는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무겁고 답답한 시대에도, 답이 보이지 않는 일상 속에서도 전유성은 무대를 통해 희망의 빛을 던졌다.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건 단순한 '웃음'이 아니라, 웃음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힘이었다. 전유성의 삶을 돌아보면,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다. 작가에서 출발해 개그맨으로, 그리고 존경받는 스승으로 살아온 그의 여정은 한국 코미디사의 굵직한 장면들과 겹쳐진다.
전유성은 떠났지만, 그의 웃음과 철학은 또렷한 추억속에 남아 있다. 방송 아카이브 속에서, 수많은 후배들의 무대 위에서, 그리고 여전히 그를 기억하는 대중의 마음 속에서 그는 웃고 있다. 묘비명에 새겨질 '웃지 마, 너도 곧 와', 이 유쾌한 조크에 담긴 건 죽음을 향한 태연함이자, 삶을 끝까지 유머로 지켜낸 거인의 마지막 메시지다. 우리 시대의 큰 별, 코미디 거목 전유성은 그렇게 영원히 웃음 속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