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국회=김시형 기자] 원민경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에 찬성 입장을 밝히면서 18년간 표류해 온 차별금지법 논의가 진전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은 힘 있는 거대 여당임에도 기독교계 등 강한 반발 여론에 따른 정치적 부담과 진보 진영의 요구 사이 '딜레마'에 놓여 있는 가운데 이제는 국회 차원에서 공론화를 미루지 않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4일 정치권에 따르면 원 후보자는 전날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필요성과 의미가 크다는 점에서 차별금지법 도입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이재명 정부 출범 후 국무위원 후보자 중 처음으로 찬성 의사를 밝힌 것으로, 강선우 전 후보자가 "차별금지법 제정은 갈등 요소가 많아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며 유보적 입장을 내놓은 것과 비교할 때 진전된 입장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차별금지법의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즉각 입법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뜻을 밝혀 왔다. 지난 7월 취임 30일 기자회견에서도 "갈등 요소가 많은 의제인 만큼 집중적인 사회적 토론이 필요하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김민석 국무총리 역시 "개인적·종교적 신념에 기초해 차별금지법을 비판할 때 처벌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박한 반대의 목소리도 있다"며 충분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차별금지법은 헌법상 평등권 보장을 위해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하자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성별·장애 등 특정 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개별법을 넘어 포괄적 차별의 정의를 법으로 명문화해 차별 행위를 예방하려는 취지다.
차별금지법은 지난 2007년 노무현 정부에서 처음 발의된 이후 18년간 폐기와 발의가 반복돼 왔다. 이명박 정부는 법무부 산하에 차별금지법 특별분과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하다 '사회적 합의 부족'을 이유로 실질적 추진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고,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단계에서 차별금지법 추진을 국정과제에 포함했지만 이후 제정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며 추진에 미온적이었고, 윤석열 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위헌 요소가 있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서는 2000년대부터 평등법, 일반평등대우법 등 차별금지 관련 법안을 제정해 왔다. 국제사회는 평등사회 실현 기반이라는 전제 아래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지속적으로 촉구해 왔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2017년 한국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으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지난해 제정을 권고하고 내년 6월까지 특별보고를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진보 진영은 공론화 추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진보당은 지난 1일 우원식 국회의장을 만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국회 공론화위원회 설치를 제안했다. 진보당 관계자는 이날 <더팩트>와 통화에서 "빛의 광장에서 가장 절실히 제기된 의제 중 하나이지만 22대 국회 들어서 법안 발의조차 되고 있지 않아 개탄스럽다"며 "충분한 토론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어 국회의장에게 직접 제안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보수·기독교계 등 강한 반발 여론에 따른 정치적 부담과 진보 진영의 요구 사이 딜레마에 빠져 있다. 검찰개혁 등 당면한 현안에 막혀 속도를 내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여가위 소속의 한 의원은 통화에서 "지난 국회에서 법안이 폐기된 이후 당내 논의가 진전되고 있지는 않다"며 "다른 현안도 많아 전반적으로 법안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민주당 관계자도 "현재 당내에서 공식 의제로 논의하고 있지 않고, 대부분 의원도 지금 당장 추진하는 데 신중한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어 사회적 논의와 병행하며 협의를 이어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법안 자체에 동의하는 의원들은 많지만 발의까지는 망설이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헌법상 평등권의 실질적 실현을 위해 필요한 법안이라는 찬성론과, 지나치게 광범위한 규정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반대 의견이 맞서는 상황에서 법안 제정을 논의할 공론장은 절실하다.
차진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적 지향 문제처럼 갈등이 큰 사안에 대해 국회가 터놓고 논의할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며 "합의되는 부분부터라도 조문을 섬세하게 다듬어 순차적으로 입법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차별금지법제연대는 "이재명 정부와 22대 국회가 더 이상 미루거나 침묵하지 말고 법 제정을 위한 구체적인 행보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