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황지향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산업재해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중대재해 반복 기업에 대해 입찰 제한, 금융 제재 등 강력한 조치를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산업계 전반이 산재 예방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조선·철강업계는 대표적 산재 다발 업종으로 꼽혀온 만큼 사내 안전관리 전담조직 확대, 스마트 안전설비 도입, 협력사와의 상생형 안전문화 확산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으며 안전관리 체계를 강화하는 모양새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HD현대는 최근 '더 세이프 케어(The Safe Care)' 제도를 전면 시행했다. 조선업 중대재해 사례를 토대로 추락·끼임·감전·질식·화재 등 9가지를 '절대불가사고'로 지정하고, 관련 안전 수칙을 위반할 경우 사고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즉시 전사 작업을 중단하는 무관용 원칙을 적용한다.
실제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경미한 사안이라도 중대재해에 준하는 엄중한 조치가 즉각 내려진다고 HD현대는 설명했다. 위반이 적발된 조직은 동일 작업에 대해 즉시 작업 중지 명령을 받고, 안전 문화 향상을 위한 종합 개선 대책을 마련해 이행해야만 작업을 재개할 수 있다.
노진율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도 직접 현장을 누비며 안전 점검에 나섰다. 노 사장은 지난달 HD현대 조선 계열사 5곳 사업장을 차례로 방문하며 안전 대응 체계를 공유하고, 폭염 속 온열질환 예방 활동 등을 챙겼다. 지난 6월에는 긴급 안전 회의를 열어 최고안전책임자(CSO)들과 각사 우수 사례를 공유하는 등 그룹 차원의 통합 안전경영 체계를 마련했다.
HD현대는 지난해 9월 국내 조선업계 최초로 중대재해 피해 유가족을 돕기 위한 'HD현대희망재단'을 설립했으며,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16개 언어 안전 교재와 한국어·기술 교육, 생활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해 다문화 인력의 안전 적응력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한화오션은 체질 개선 수준의 안전 쇄신을 내세우며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다. 2024년부터 3년간 총 1조9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으며, 지난 한 해에만 6241억원을 집행해 당초 계획을 웃돌았다. 올해는 7869억원을 확보했고, 1분기에만 899억원을 이미 투입했다.
투자금은 안전 관제 인프라 확충과 노후 장비 교체에 집중됐다. 스마트 안전야드 구축을 위한 통합관제시스템·센터를 추진하고, 고소차·지게차·크레인 등 노후 설비 교체에만 2884억원을 집행했다. 신규 안전 아카데미 설립과 안전문화 프로그램 도입도 병행 중이다.
인력 확충에도 적극적이다. 최근 안전 전문인력 27명을 신규 충원하고, 협력사 안전요원도 기존 대비 2배 증원했다. 단순히 숫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훈련을 통해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또 안전보건 전문가들로 구성된 외부 안전 거버넌스를 둬 객관적인 진단과 조언을 받고 안전경영 평가·수준 향상 프로그램을 통해 내부 체계도 점검한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5월 거제조선소에 통합관제센터를 열었다. 198㎡ 규모의 관제센터에서는 야드 내 CCTV를 통합 모니터링하고 화재 위험 구역에는 AI CCTV를, 고위험 작업장에는 이동형 CCTV를 배치했다. 드론 순찰과 스마트헬멧도 도입해 사고 시 신속 대응이 가능하도록 했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안전에 대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며 "앞으로도 안전경영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조선소 현장 전반의 리스크를 줄여나가겠다"고 말했다.
조선업계는 오랜 기간 산업재해 다발 업종으로 지목돼 왔다. 근로복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조선 3사의 사고성 산재 승인 건수는 △2020년 315건 △2021년 374건 △2022년 490건 △2023년 617건 △2024년 702건으로 최근 5년 새 꾸준히 증가했다. 올해 4월까지도 이미 186건이 승인됐다.
고용노동부가 최근 발표한 2025년 2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재해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287명으로 집계됐다.
철강업계 역시 업종 특성상 산재 위험이 상존하는 산업군이다. 지난달 14일 포스코 광양제철소에서는 한 노동자가 작업 중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포스코그룹은 이를 계기로 기존 사업회사 중심 안전관리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룹 중심 안전관리 체제'로 전환했다.
지난달 말 회장 직속의 그룹안전특별진단TF를 출범시켜 전사 안전 체계를 점검하고 있으며 다단계 하도급 구조 혁신, 안전 예산 대폭 확대, 안전 전문회사 설립 검토, '산재가족돌봄재단' 설립 등 종합적인 안전관리 혁신안을 추진 중이다.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은 지난 9일 인명사고가 잇따라 정부 전수조사 대상에 오른 포스코이앤씨 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직접 찾아 TF 회의를 주재하며 안전 의지를 드러냈다. 이어 22일에는 그룹 안전 특별점검회의를 열고 작업자들이 현장의 위험을 실시간으로 신고할 수 있는 '통합 안전제보 시스템' 참여를 독려했다. 이 제도는 포스코그룹이 지난 18일부터 시행해 현장 근로자가 위험 요인을 즉시 제보하면 신속히 대응할 수 있도록 한 장치다. 장 회장은 회의에서 "안전 전문회사와 산재가족돌봄재단 설립 등 현재 검토 중인 혁신 과제를 차질 없이 추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잇따른 사망 사고가 발생한 현대제철도 안전경영 체계를 재정비하고 있다. 당진제철소에서는 지난해 노후 배관 점검 중 가스가 누출돼 근로자가 사망했으며, 올해 초에는 하청노동자가 코크스(석탄을 가공해 만드는 원료) 냉각 설비인 CDQ 3호기 공사 현장에서 약 13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현대제철은 이를 계기로 '안전한 100년 제철소 구현'이라는 비전을 내세우고 안전·보건·환경(SHE)본부 중심의 전사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을 강화했다. ISO 45001 인증 유지, 노사 공동의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운영, 안전보건환경본부장 주관 안전경영총괄회의 등을 통해 제도적 기반을 다졌으며 지난달에는 협력사들과 '하나의 안전가치 추구' 협약을 체결해 상생형 안전문화 확산에도 나섰다.
동국제강은 지난해 277억원, 올해 247억원 규모의 안전보건 예산을 집행하며 3S(스마트·세이프·스트롱)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통합안전환경시스템(D-SaFe)을 구축하고 작업중지권을 전사로 확대했으며, 위험성 전과정 평가(R-LCA)를 도입해 안전관리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또 '안전 허들(Hurdle)' 전산시스템을 통해 협력업체의 안전 역량을 사전에 검증하는 등 공급망 전반으로 안전 기준을 확산시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조선·철강업은 전통적으로 고위험 업종으로 분류돼 왔다"며 "기업이 아무리 많은 대책을 내놔도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인 만큼 무엇보다도 '현장 실행력'을 높이는 데 기업과 근로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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