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권 소멸 아니지만 소송권 행사할 수 없어" vs "한국 법원 맞나"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했다. 피해자 측은 실망한 모습을 보이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7일 오후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닛산화학·스미토모 금속광산·일본제철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선고 기일을 열고 원고 측 청구를 각하했다.
법원은 한일 청구권협정의 내용상 한국 국민인 원고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조약 내용의 의미는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은 아니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건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또 재판부는 국제관습법을 성문화한 비엔나협약을 들며 "식민지배 불법성을 인정한다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조약'에 해당하는 청구권협정을 이행하지 않는 건 정당화될 수 없다. 한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원고 측 청구를 인용해 (배상 판결) 강제집행까지 진행될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 등을 고려하면, 강제집행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 대원칙을 침해하는 것으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라며 "이 사건 피해자들의 청구권은 소송을 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밝혔다.
이 소송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가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사건이다. 피해자들은 2015년 일본 기업 17곳을 상대로 소송을 냈으나 한 곳에 대해 소송을 취하했다.
소송 제기에도 뚜렷한 대응을 하지 않던 일본 기업들은 3월 법원이 공시송달을 진행하고 선고 기일 지정을 서두르자 뒤늦게 국내 변호사들을 대리인으로 선임해 대응하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 측은 지난달 열린 1차 변론기일에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주장은 사실관계가 부실하고 입증도 안 됐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애초 10일에 이 사건 판결을 선고할 예정이었지만, 이날 돌연 선고를 앞당기겠다고 원고와 피고 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선고 뒤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선고기일 변경은 당사자에게 고지하지 않더라도 대법원 판례상 위법하지 않다"며 "이 사건은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소송대리인에게 전자 송달과 전화 연락 등으로 고지했다"고 해명했다.
또 "변론 속행을 구하는 당사자들이 있었으나 무변론 소각하도 가능한 사건이라 받아들이지 않았다"며 "법원은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이러한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재판이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난 소송당사자들은 '한국 법원이 맞냐'고 개탄하며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강제징용 피해자의 아들 임모 씨는 "일본이 뭐길래 남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냐. 나라가 독립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렇게 살았다고 이걸 요청했는데 오늘 한심한 결과가 나왔다"며 "아버지, 이 판사들이 한국 판사가 맞냐. 한국 법원이 맞냐"고 울분을 토했다.
장덕환 대일민간청구권소송단 대표는 선고기일이 갑자기 앞당겨진 것에 대해 "아침 9시가 좀 넘었을 때 기자분들이 저한테 전화를 수없이 하더라. 변호사님에게 연락했더니 변호사님도 황당해하시더라"고 설명했다.
장 대표는 이날 판결에 대해서도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언제까지 우리가 이렇게 울어야 하는지 정말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라며 "(일본 기업이)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 이하의 짓을 했는데 어떻게 사법부가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는 필요 없다"고 비판했다.
원고 측 대리인 강길 변호사는 "판결문을 자세히 검토해봐야 알겠지만, 기존 대법원 판결을 존중해 청구권이 있다고 본 것 같다"며 "그렇다면 심판 대상으로서 적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재판부에서는 양국 간 예민한 사안이라 좀 다르게 판단한 것 같다"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강제징용 상태에서 임금도 받지 못한 아주 부당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임금과 그에 해당하는 위자료는 배상해야 한다. 양국 관계도 그런 기초 위에서 다시 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ilraoh@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