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 l 광양=김영신 기자] "처음에는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포성이 계속 들리고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그때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전남광주 광양에 거주하는 유조선 기관사 홍지훈 씨 말이다.
8개월간 항해를 마친 홍 씨는 지난 12일 배에서 내렸다. 긴 항해를 마친 뒤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아직도 위험천만했던 호르무즈 해협과 중동의 바다가 선명하다.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한 홍 씨에게 호르무즈 해협은 낯선 항로가 아니었다. 기관사로 유조선에 승선하면서 여러 차례 이 해역을 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라면 수많은 항로 가운데 하나였을 호르무즈 해협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른 공간으로 다가왔다. 중동 지역 군사적 충돌이 격화하면서 항해 자체가 공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홍 씨는 "예전에도 호르무즈 해협을 여러 번 통과한 적이 있어서 처음에는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며 "그런데 전쟁 상황이 계속되고 포성이 들리기 시작하니까 '이번에는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공포가 느껴졌다"고 말했다.
항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하지만 에너지 수송 임무를 수행하는 유조선은 상황이 위험하다고 해서 언제든 운항을 중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유가 국내에 들어와야 산업이 돌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여수항에 내리기 까지 걸린 홍 씨의 8개월 여 항해는 여수와 중동을 3번 오가는 항해였고, 항로 자체를 다시 짜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두 번째 항해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을 정상적으로 통과하기 어려워지면서 기존 항로를 변경했고, 배는 예멘으로 방향을 틀어 원유를 실었다. 세 번째 항해에서도 긴장이 계속됐다. 홍해를 통과하는 동안에도 주변 정세를 예의주시하며 항해해야 했다.
바다 위에서는 육지처럼 위험을 피해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아탈 수도 없다. 위험 해역에 한 번 들어서면 배와 선원 모두가 그 상황을 감당해야 한다.
홍 씨는 "위험 지역에 들어가면 위험수당이 나오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 상황에 놓이면 돈은 의미가 없다"며 "선장을 비롯한 모든 선원들이 긴장했다. 가족을 생각하며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날마다 걱정했다"고 당시 심정을 담담하게 말했다. 수개월 동안 배 위에서 생활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선원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전쟁 위험이 있는 해역을 통과할 때 심리적 부담은 평상시 항해와는 다르다.
홍 씨는 여수항에 들어와서 배를 세우고 나서야 "휴~ 이제 됐다"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씨는 "원유를 실은 배가 출항하고, 수천㎞ 바다를 건너고 위험 해역을 통과해 국내 항만에 도착하기까지 선원들은 배를 떠날 수 없다"며 "우리가 하는 일이 결국 우리나라 산업과 연결돼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8개월 항해를 끝낸 홍 씨는 잠시 육지에 머무르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있다.
생업의 현장이면서 때로는 두려움의 공간이 되는 바다이지만 홍 씨는 원유를 싣기 위해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배 안에서는 홍 씨와 같은 기관사와 선원들이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킬 것이다.
대한민국 산업과 국민들에게 필요한 원유가 국내 항만에 도착하기까지, 바다 위에서는 오늘도 누군가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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