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캄캄한 독도 바다에 우렁차게 돌아간 엔진…그곳에 '섬마을 맥가이버'가 있었다


한밤중 전화에도 부둣가 달려가 만선 이끈 '등대지기'
묵묵한 50년 삶의 궤적이 만든 울릉도·죽도 환한 불빛

독도 암벽에 한국령을 서각한 조명호 씨. 그는 1960년대 당시 울릉도 유일 가전제품 수리 기술자였다. /본인 제공

[더팩트ㅣ울릉=김성권 기자] 전기가 귀하던 시절, 동해 오지의 섬 울릉도와 죽도의 밤을 밝히고 주민들의 생계 터전을 지켜온 한 전기 기술자의 빛나는 삶의 기록이 전해져 감동을 주고 있다.

1960년대 후반 기술을 배우라는 부친의 권유로 울릉도 도동 해변 합동칠공소 아래 '한양가공사'에서 일을 시작한 청년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1967년 당시 17세의 나이로 독도 암벽에 '한국령'을 서각한 조명호(76) 씨다.

◇독도 통신장비를 살려낸 19세 청년의 첫발

그가 손에 기름을 묻히며 일을 익히던 1969년 봄, 독도에서 배터리 충전용 발전기가 고장 나 통신장비가 먹통이 되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겨우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던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품고 독도에 입도했다.

소형 발전기(0.3kW 2싸이클)의 배기구가 혼합유의 카본으로 막힌 것을 찾아내 조심스럽게 제거하자, 멈춰 섰던 엔진이 다시 우렁차게 돌기 시작했다. 경비대원들은 "아버지 따라 기술이 참 좋다"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는 그가 평생 '섬마을 맥가이버'로서 살아가게 된 화려한 첫발이었다.

발전기부터 가전제품 수리 회고록. /본인 제공

◇호롱불에서 디젤 발전기까지…울릉도 어선 집어등 변천사의 산증인

그가 작성한 회고록에는 울릉도 어민들의 젖줄이었던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集魚燈) 변천사'가 생생히 기록돼 있다. 초창기 석유등에서 시작해 차량용 배터리, 군용 스몰엔진 발전기를 거쳐 디젤 엔진에 V벨트를 연결하는 방식, 그리고 메탈라이트 전구와 지금의 LED 전구에 이르기까지, 울릉도 어업의 발전은 곧 섬 기술자들의 피와 땀이었다.

"오징어잡이 어선 한 척에는 10여 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습니다. 밤사이 발전기가 고장 나 작업을 못 하면 선주뿐만 아니라 선원 10여 가구의 생계가 막막해지는 것이죠."

그는 잠을 자다가도 한밤중에 어선 발전기가 고장 났다며 전화가 오면 주저 없이 일어났다. 아침 일찍 부둣가에 나가면 밤새 수리를 받은 선장이 "덕분에 오징어를 많이 잡았다"며 갓 잡은 싱싱한 오징어를 던져주곤 했다. 타인의 슬픔과 곤경을 외면하지 못했던 그의 정성이 울릉도 밤바다의 만선(滿船)을 이끈 셈이다.

독도 암벽에 한국령을 서각한 조명호 씨. 그는 1980년대 당시 발전기 수리 기술자였다. /본인 제공

◇비포장 고갯길 넘다 넘어져도…"소비자에게 늘 미안한 마음"

1980년대 울릉도에 가정용 냉장고(삼성·금성·대우)가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도 섬 전체에서 냉장고를 수리할 수 있는 이는 그가 유일했다. 공식 A/S센터 하나 없던 시절, 그는 오토바이에 묵직한 공구함을 실은 채 서면과 북면을 잇는 험준한 비포장 고갯길을 넘나들었다.

군 복무 시절(1973년) 하반신 마비 증상으로 의가사 제대한 후 남아 있던 후유증 때문에 험한 길에서 오토바이가 뒤집혀 다치는 일도 허다했다. 그의 회고록 속에는 태하동의 한 주민 집 냉장고 압축기(콤프레샤)를 몇 번이나 교체해 주고도 도로 사정 때문에 부품이 자꾸 고장 나 끝내 완전히 고쳐주지 못했던 일에 대해 "지금도 가끔 생각나고 미안하다"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책하는 따뜻한 성품이 그대로 녹아있다.

◇"어선 수가 급격히 줄어 안타까워"…기술자의 따뜻한 섬 사랑

자기 기술로 국가에 이바지하고 수많은 상장을 받으면서도 경찰 특채나 민간 혜택 권유를 '민간인으로서의 삶'을 이유로 사양했던 그는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상이군경 국가유공자로 등록됐다.

그는 회고록 마지막 장에서 "최근 울릉도는 오징어 어황 부진과 감척으로 인해 어선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너무나 안타깝다"며 평생을 바쳐온 터전과 어민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내비쳤다.

화려한 빛 뒤편에서 기름때를 묻히며 밤을 지새우던 이런 무명 기술자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독도와 울릉도의 환한 불빛이 유지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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