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여수=고병채 기자] 정치권 주도로 광주·전남 행정통합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전남 동부권이 논의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 2일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행정통합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이후 오는 15일 특별법 공청회와 16일 정부 차원의 법안 발의가 예고되면서 통합 논의는 불과 보름 만에 제도화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지역 정치권과 시민사회, 경제계가 한자리에 모여 공동 대응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13일 오후 여수상공회의소 열린마루 회의장. 행사 시작을 알리는 안내가 나오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참석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여수·순천·광양·보성·고흥·구례 등 전남 동부권 각지에서 모인 시도의원과 시민단체, 노동계, 경제계 인사들의 표정에는 공통된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논의가 너무 빨리 간다", "동부권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행사 전부터 여기저기서 오갔다.
이날 열린 '전남 동부권 열린 포럼'은 광주·전남 행정통합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불안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정치권 주도 일정이 앞서가는 상황에서, 동부권 차원의 구체적인 요구와 대응 전략을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포럼을 관통했다.
사회를 맡은 김대희 여수YMCA 사무총장은 포럼 취지를 설명하며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특별연합 수준으로 거론되던 논의가 갑자기 행정통합으로 전환됐다"며 "시민 참여와 충분한 논의 없이 하향식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동부권의 입장이 사실상 사라진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첫 발언에 나선 백인숙 여수시의회 의장은 통합 논의의 전제가 돼야 할 조건부터 짚었다. 백 의장은 "여수공항 국제공항 승격과 고속도로 여수 연장, 한반도 KTX 여수 연결 같은 국가 교통 인프라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국가산단을 통해 막대한 국세를 부담해 온 여수가 통합 이후에도 희생만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발언이 이어질수록 포럼의 분위기는 점점 진지해졌다. 구민호 여수시의원은 과거 노무현 참여정부 당시 전남대와 여수대 통합 사례를 언급하며 "통합 당시 수많은 약속이 있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은 것이 적지 않다"며 "이번 행정통합도 법적 구속력과 이행 장치가 분명하지 않으면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 접근성과 공공의료 강화 문제를 언급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는 참석자들도 눈에 띄었다.
노동계에서는 산업 위기와 고용 불안을 직설적으로 토로했다. 최관식 민주노총 여수시지부장은 "여수산단 기능 인력은 전국 최고 수준이지만, 일자리가 불안해지면서 외지 유출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통합 논의가 노동자 보호와 산업 전환 대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역은 더 빠르게 쇠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계의 시선은 교통과 물류로 향했다. 한문선 여수상공회의소 회장은 "석유화학 산업 회복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대체 산업을 유치하려면 공항과 교통 인프라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여수공항 활주로 확충과 국제화물 운항 여건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했다. 이어 "한반도 KTX '수도권 2시간 생활권'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지역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기 위한 상공인들의 절박한 요구"라고 덧붙였다.
절차 문제를 둘러싼 논쟁도 빠지지 않았다. 문갑태 여수시의회 부의장은 "주민투표를 할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며 "도의회 의결만으로 통합을 밀어붙이면 갈등은 통합 이후 더 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고효주 여수시 의정동우회 회장은 주민투표 필요성을 가장 강하게 제기한 인물이다. 고 회장은 "행정통합은 단순한 행정조정이 아니라 주민 삶의 구조를 바꾸는 중대 사안"이라며 "이 문제를 도지사나 시장, 의회가 대신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주민투표법상 행정구역의 폐지·설치·분할·통합은 주민투표 대상"이라며 "전남·광주 통합 역시 예외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고 회장은 과거 여수시 2청사 이전과 관련한 주민투표 소송 사례를 언급하며 "대법원 판결에서도 주민투표 대상 사안을 행정이 일방적으로 처리한 것은 위법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며 "이번 통합 역시 주민투표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이후 갈등과 책임 문제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주민투표 추진과 동시에 동부권의 요구를 정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두 개의 트랙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회 일정이 언급되자 회의실의 공기는 한층 무거워졌다. 민형배 국회의원실 관계자는 "특별법 초안이 빠른 속도로 정리되고 있다"며 "상임위 논의 과정에서 지역 요구를 얼마나 반영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주철현 국회의원실 관계자도 "동부권의 요구를 구체화해 국회 논의 테이블에 올리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포럼의 마지막 발언을 맡은 김신 여수시여수산단공동발전협의회 사무국장은 동부권 전체 이야기를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수는 석유화학 산업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 전환이 시급하다"며 "광주·전남연구원의 '광주·전남 통합 1차 연구'에서와 같이 석유화학·철강 지원에 머문다면 우리는 같은 산업 구조 속에서 같은 어려움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모멘텀이 필요하다"며 "여수는 여수대로, 순천은 순천대로 흩어지지 말고 동부권 요구를 하나로 묶는 협의체를 지금이라도 발족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포럼에는 발언자 외에도 전남녹색연합과 여수YWCA, 동서포럼 여수·순천·고흥·구례 관계자, 여수지속발전협의회, 더불어민주당 전남기본사회위원회 여수지회 관계자들이 참석해 의견을 공유했으며, 명창환 전 행정부지사도 자리를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통합 찬반을 넘어 동부권의 실질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사회를 맡은 김대희 여수YMCA 사무총장은 포럼 마무리 발언에서 "오늘 토론은 통합 찬반을 가르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전남 동부권이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정리하는 출발점"이라며 "여수·순천·광양·구례·곡성·고흥·보성이 각자 목소리를 내는 방식으로는 통합 논의 과정에서 실질적인 반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김 총장은 "오늘 제기된 주민투표 요구와 특별법 대응, 산업 구조 전환과 공공의료·교통 인프라 문제 등은 동부권 공통의 과제"라며 "이 의견들을 정리해 상설 협의체 구성 여부를 포함한 다음 단계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또 "일회성 토론에 그치지 않고 정기적인 간담회와 연속 논의를 통해 전남 동부권의 공동 입장을 만들어가겠다"고 덧붙였다.
kde3200@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