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분야를 지키는 '쟁이'들] ⑤대구 맞춤 정장 장인 장성필 대표


"저보고 '방망이 깎는 노인'이라고 합니다"

대구 남구 봉덕동의 매니아 맞춤 정장점에는 50여 년간 양복업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성필 대표가 있다. 그는 윤오영(1907~1976년) 수필가가 지은 방망이 깎던 노인에 나오는 주인공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대구=김민규 기자

사회가 급변하면서 다양한 직업이 사라지고 있다. 그중 특정 분야의 경우 '더 이상 기술을 배울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 일부는 장인들을 통해서 힘겹게 기술의 명맥이 유지되고 있지만 옛 명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대구는 한 때 '섬유 도시'라고 불렸지만, 이면에는 '기술의 도시'라고도 불릴 만큼 다양한 기술자들이 존재했다. 한때 대구 지역에서 가죽수선부터 구두수선, 시계수리, 맞춤양복, 열쇠 등의 기술로 명성을 날렸던 숨은 고수들을 만나 역사와 현재 상황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더팩트ㅣ대구=김민규 기자] "손님 말대로 줄여달란 대로 줄이다간 기껏 용 그려놓고, 뱀눈 찍는 꼴 납니다. 용인지 뱀인지는 완성해서 입어보면 알 겁니다."

대구 남구의 한 맞춤양복점에는 종종 손님과 사장님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양복을 맞추러 온 이들과 장성필(70) '매니아' 대표 사이의 신경전이다. 대개 손님은 유행을 따른 사이즈를 원하고, 장 대표는 "옷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며 만류한다. 결국 손님이 백기를 든다. 기싸움에 진 손님들은 부루퉁한 표정이지만 완성된 옷을 입어본 후에는 입이 귀에 걸린다. '매니아' 손님들은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쳐 골수팬이 된다.

장성필 맞춤 정장점 '매니아' 대표의 양복 경력은 인생의 3분의 2가 넘는다. 그 긴 세월 중에 그저 때우듯 보낸 시간은 없었다. 한해 한해 아등바등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게다가 부모님이 일찍 떠나시는 바람에 동생까지 돌봐야 했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 기술을 배워야 했다. 조금 자리를 잡았다 싶을 즈음엔 공장제 양복이 쏟아져 나왔다. 맞춤 양복의 자존심을 지키며 악전고투했다. 세상이 그를 안 죽을 만치 담금질했고, 맞춤 기술 하나로 그 세파에 맞서 싸웠다. 그 시절의 일화 몇 토막만 들어도 그의 내공과 실력이 짐작 갈 정도다.

그는 양복을 처음 배울 당시 견습생으로 있던 양복점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당시 양복점 사장은 장 대표를 향해 항상 "재바리다(재빠르다)"라며 성실함을 인정했다. 양복점 일이 끝나는 시간인 밤 10시면 청소는 항상 그의 몫이었다. 자투리 천이나 버리는 원단은 그에게 좋은 실습 재료였다. 바느질부터 재단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 덕에 남들보다 자연스레 두 배 이상 일을 할 수 있었고 하나를 가르쳐 주면 쉽게 셋을 터득할 수 있었다.

손에 감각을 익히자 선배들 실력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사장 입장에서는 같은 일을 맡겨도 두 배 이상 꼼꼼하고 빠른 장 대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후 사장은 파격적인 인사로 선배들보다 빠르게 진급을 시켰고 젊은 나이에 부산에서 '실력 있는 양복쟁이'라고 불렸다.

스물두 살 되던 해에 고향 대구로 돌아와 양복점을 차렸다. 인근 양복점 사이에서는 '부산에서 좀 배운 놈이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부러 진상 손님을 보내 '간'을 보기도 하는 등 견제가 심했다.

그는 보란 듯 '맞춤 정장 10만 원'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남들보다 빨리 만드는 것은 자신 있었고, 원단의 경우 대량으로 구매하면 단가가 낮춰지는 점을 고려했다. 자칫 망할 수도 있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대구 남구에 위치한 매니아 맞춤 정장 전문점. 이 매장에는 고급스러운 은은한 조명 대신 자연광에 가까운 LED조명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장 대표는 모직이나 고급 원단일수록 조명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반드시 손님들이 자연광과 유사한 조명으로 원단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대구=김민규 기자

◇"자기가 무슨 '방망이 깎는 노인'도 아니고…"

파격적인 가격이 소문나자 손님들은 벌떼같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양복을 실제 맞추는 이들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대기업이 만든 기성 양복이 저렴하게 나온 데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손님들의 맞춤 양복에 대한 관심도 떨어질 때였다.

"맞춤 양복은 체형에 맞게 가장 편하게 입는 것입니다. 손님이 원하는 대로 해줬다가 나중에 좋지 않은 소리를 듣는 게 뻔합니다."

당시 그의 매장을 찾은 고객 대부분이 장 대표와의 실랑이에서 두 손을 든 이들이었다. 가격이 10만 원. '속는 셈 치고 맞춰보자'는 마음으로 장 대표가 시키는 대로 양복을 맞췄고 결과는 하나 같이 '양복이 매우 편하다'는 평이었다. 옷을 잘 맞춘다고 소문이 나자 금융업계 임원들의 단체주문이 들어왔다. 출장을 가서 옷을 잰 후 가봉된 옷을 일일이 입혀본 후 납품했다.

한 유명 정치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옷을 맞추지 못하자 '자기가 무슨 방망이 깎는 노인이라고…'라며 매장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그는 얼마 후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난 동료 정치인을 마주쳤다. "그 옷 어디서 맞췄냐?"고 물었더니 '매니아'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결국 다시 매니아를 찾아와 양복을 맞췄다.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일화다. 그 정치인의 매니아의 골수팬이 된 건 물론이다.

장 대표는 양복점을 찾는 연예인들이 종종 찾는 이유가 저렴한 가격에 원하는 원단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대구=김민규 기자

연예인의 경우 신체적 특징에 따라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맞춤 정장을 필수로 입는 경우가 많다. 수도권보다 저렴하고 다양한 원단 때문에 장 대표의 매장을 찾는 이들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대구=김민규 기자

그의 매장 한편에서는 전직 대통령과 정치인, 유명 연예인들까지 찾아온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투아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대구를 찾을 때마다 장 대표를 찾아 자신과 측근 양복까지 100벌 이상 맞춰가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들은 하나같이 "원단은 물론 저렴한 가격에 하루 만에 양복을 맞출 수 있는 것이 장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장 대표의 4층 건물에는 층별로 양복 장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90년대 초 대기업 기성복에 밀려 매장을 접은 내로라 하는 기술자들을 모두 장 대표의 건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분야별 기술자들이 파트별로 자리를 맡고 있는 덕에 하루 만에 맞춤 양복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장 대표의 매장은 4층으로 된 건물로, 1층의 경우 매장, 2~4층의 경우 양복을 제작하는 공정이 단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공장형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대구=김민규 기자

"맞춤 양복은 1인치(약 2.54cm) 차이가 옷의 맵시와 편안함을 결정합니다. 양복을 입고 정면에서 보는 것뿐만 아니라 뒤태와 움직임까지 고려해야 합니다. 줄이고 늘여달라고 하는 대로 해줬다가는 기성복보다 못하다는 평판을 듣기 일쑤입니다."

그의 매장은 여느 맞춤 정장점처럼 은은한 조명 대신 밝은 LED 조명으로 밝혀져 있다. 모직 원단일수록 자연광과 가장 유사한 조명으로 봐야 한다는 철칙 때문이다. 은은한 조명일수록 모직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저렴한 폴리에스터 원단이 더 고급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연광이나 밝은 곳에서는 완전히 다른 색상을 띨 수 있다.

그는 양복 기술자들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맞춤 양복은 전 과정을 다 섭렵하고 직접 일을 해봐야 합니다. 인생을 양복과 함께 살았지만 저는 아직도 기술을 배우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손님들과 옥신각신하는 경우가 줄었지만 '양복쟁이'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마저 버린다면 양복의 진짜 기술이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20여 년째 양복업을 함께하고 있는 아들도 기술자의 자존심을 이어갔으면 하는 게 마지막 바람입니다."

장성필(왼쪽) 대표가 아내인 은명숙 대표와 양복 원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는 손이 허용하는 이상 양복쟁이의 산증인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대구=김민규 기자

tktf@tf.co.kr

Copyright@더팩트(tf.co.kr)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