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 앞에서도 '죽음의 행진'을 마다하지 않았던 5월 광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의 정수인 똘레랑스의 가치를 평생에 걸쳐 설파하며 살아왔던 인문주의자 고(故) 홍세화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니까.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더팩트>가 5월의 기억을 여전히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찾아 나섰다. 1980년 그날, 광주의 5월은 그랬었고, 또 앞으로도 여전히 숭고한 이들이 피를 바친 희생의 제단 위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더팩트 l 광주=나윤상 기자] "5⋅18은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군인들을 물리친 세계사적 민중 승리의 역사입니다."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역사, 슬픔의 역사라고 말한다. 자국 군대에 의해 짓밟힌 국민들의 애섧은 장송곡이 흘러나오면 자랑스럽게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 동신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경창수(63) 씨는 5⋅18민주화운동을 승리의 역사라고 힘주어 말한다. 세계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시민들의 힘으로 무장한 군에 맞서 싸워 물리친 역사의 기록은 광주밖에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경 씨는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정권은 실종된 사람들을 찾지 못하기 위해 비행기로 시신을 바다에 유기하고 그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30년 이상이 흘러야 했다"면서 "우리나라 국민은 10년도 안 돼서 청문회를 열어 그날의 진실에 대해 다가설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1980년 광주시민들이 군부대와 맞서 싸워 승리한 역사가 있기에 독재자들을 8년 만에 단상에 올려놓고 청문회를 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경 씨가 1980년 5⋅18민주화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친구 지대위 씨 때문이었다. 그의 집은 광주 동구 학운동 근처였는데 지금의 조선대병원 후문 쪽 방향이었다. 고3으로 대학 입시를 앞두고 열심히 공부할 때였고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경 씨는 "18일 저녁 9시경에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친구 지대위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대위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좀 찾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공부만 했기 때문에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다음 날 친구 지대위 씨를 찾기 위해 금남로로 향했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19일 공수부대원들이 곤봉과 대검으로 젊은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도로변에 서서 같은 모습을 지켜보던 할아버지들이 "인공시절에도 저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쳤을 정도였다.
끔찍한 광경을 본 그는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공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20일부터 시위대에 합류해 무장한 군인들과 싸웠다. 20일부터 21일까지 무장한 공수부대원들과 시민들의 밀고 밀리는 싸움이 지난하게 계속되었다. 그는 이 싸움을 ‘24시간 투쟁’이라고 불렀다.
경 씨는 24시간 투쟁에 대해 "광주시민들이 시내 여러 곳에서 군인들과 대치하고 싸웠다"면서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타고 총도 들고 있었지만 당시 시민들이 너무 많고 떼 지어 밀고 들어가니까 당황해서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시민들이 많으니까 총으로 다 죽일 수는 없는 것 아니었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그는 21일 새벽 1시경 광주역 방면에서 계엄군이 총을 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당시 20일 밤 11시 광주역에 주둔 중이었던 3공수여단은 최초로 집단 발포를 했다. 이때 최소 5명의 시민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최세창 3공수 여단장이 밤 10시 30분경 부대원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11시경 직접 공중에 총 3발을 쏴 사실상 사격 명령을 내렸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이후 3공수여단 소속 계엄군은 광주역에서 시민을 향해 실탄 발포를 한 것에 대해 "시민들의 시위에 두려움을 느껴 자위권으로 발포한 것"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경 씨는 계엄군의 이런 증언에 대해 "20일과 21일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어서 실제 무장군인들이 두려워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공감했다. 그만큼 광주시민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고 계엄군을 향해 날카롭게 맞서고 있었다.
그는 시위대와 함께 밤을 새워 싸우다가 21일 오후 1시 금남로 전일빌딩 앞 가장 맨 앞줄에 서 있게 된다.
경 씨는 "애국가가 울렸다고 하는데 그 기억은 나지 않는다. 총소리인지 뭔지 모르지만 장갑차에서 무엇인가 쏘면 ‘따다다다당’ 소리가 나서 ‘오공탄’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는데 그런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등을 돌리고 무조건 뛰었다"고 말했다.
이어 "막 뛰어가는데 옆에서 뛰던 한 여자가 옆구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계엄군을 등지고 뛰고 있었으니까 총을 맞아도 등을 맞아야 하는데 옆구리에 총을 맞은 것은 옆 건물에 위치한 저격수들이 쏜 총에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언급했다.
그는 전일빌딩 옆쪽 작은 도로로 뛰어가니까 거기에 경찰들이 서 있다가 시민들에게 도주로를 안내했다고 기억했다. 오후 5시에 양림동 친구 누나 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밤새 싸우다가 순간 긴장이 풀어져서 집 마루에서 한숨 자고 일어났다고 한다.
경 씨는 "1시간 정도 일어났는데 무등산이 보였다. 그 산을 보자마자 방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이 갑자기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가 싶었다.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광주시민들의 평온했던 일상을 파괴하고 무너뜨린 몹쓸 짓을 한 것이다"며 분노했다.
21일 계엄군이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고 난 후에도 그는 시민수습위원회에서 일을 했다. 학생들이 주로 했던 시신이 안치된 장소 안내 역할을 맡았다.
그러다 결정의 27일이 찾아왔다. 그는 도청 뒷 편 전남경찰청 쪽문이라고 불리는 쪽에서 경계를 서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다 공수부대원들이 밀려들고 투항하면 살려주겠다는 확성기 소리를 들었다.
경 씨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옆에서 학생들은 살아남아서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라며 투항하라고 했다. 계엄군에 투항하니까 개머리판으로 허리를 내리찍는데 창자가 터질 정도로 아팠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이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수사를 받다가 7월 3일 잡혀간 지 38일 만에 풀려나왔다.
그가 상무대 영창에 갇혀 있는 사이 그의 가족들은 도청 주변을 매일 나왔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혹여 죽지나 않았을까 싶어 상무관과 도청에 시신 확인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나경택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그 사진 속 아버지는 후에 지만원의 '광수 93번'이 되었다.
경 씨는 "기가 막혔다. 아버지를 보고 지만원이 '광수 93번'이라고 지목하고 최태복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이라고 소개했던 것 같다"면서 "소송을 하려고 했는데 그 사이 책을 다 회수하고 그래서 못했는데, 현재도 5⋅18을 왜곡한 것으로 감옥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인과응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가 5월이 되면 추모의 열기로 가득한데 이제는 광주시민들을 영웅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1980년 5월은 광주시민의 위대한 항쟁이었고 군인들을 몰아내고 자치 공동체를 만든 위대한 역사로 평가받아야 한다"며 "광주시민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대한민국도 미얀마처럼 군부독재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라도 승리의 역사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kncfe00@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