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칼 앞에서도 '죽음의 행진'을 마다하지 않았던 5월 광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의 정수인 똘레랑스의 가치를 평생에 걸쳐 설파하며 살아왔던 인문주의자 고(故) 홍세화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니까.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더팩트>가 5월의 기억을 여전히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찾아 나섰다. 1980년 그날, 광주의 5월은 그랬었고, 또 앞으로도 여전히 숭고한 이들이 피를 바친 희생의 제단 위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더팩트 l 광주=나윤상 기자] 2021년 KBS 광주총국은 5⋅18 특집방송으로 '나는 계엄군이었다'를 방영했다. 이 방송에는 1980년 당시 11공수여단 소속 계엄군으로 광주에 왔었던 최병문 씨가 출연했다.
최 씨는 1980년 5월 23일에 주남마을에 주둔해 있었던 계엄군 중 한 명이었다.
최 씨의 증언에 따르면 5월 23일 오전 계엄군이 마이크로 버스에 총을 쐈고 생존자 확인을 위해 버스에 올라갔는데 17명에서 18명이 죽어있었다. 그 중 유일한 생존자는 앳된 얼굴에 어린 여학생이었다.
최 씨는 이 여학생을 주둔지로 데리고 갔다. 최 씨가 데려온 여학생을 보고 부대원들 사이에선 "쏴 죽이지 않고 왜 데리고 내려왔나"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최 씨의 이런 증언은 주남마을 학살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 씨와 말과 많은 부분이 일치한다.
하지만 최 씨의 증언과 홍 씨의 말이 결정적으로 나뉘게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바로 시간이다. 최 씨는 본인이 관계됐던 주남마을 사건의 시간대를 오전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홍 씨는 오후였다고 주장했다.
또 최 씨는 그 당시 여학생의 머리 형태를 어깨까지 내려온 단발머리로 기억하고 옷차림을 하늘색 트레이닝복으로 특정하고 있는데 반해 당시 홍 씨는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 차림이었다고 말했다.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당시 최 씨의 소속 부대원들이 부상자인 남자 2명을 주둔지로 데려와 죽이고 암매장했는데, 당시 그 소녀는 이 두 남자들을 알고 있었지만, 홍 씨는 두 남자를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증언했다.
현재 주남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공수부대 주둔지 앞에 암매장 장소가 있고 그곳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나는 계엄군이었다' 방송이 나간 후 주남마을 학살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 씨에게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당시 주남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던 계엄군이라고 소개하며 그녀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다.
홍 씨는 "나모 씨라는 사람이 자신이 당시 계엄군이었다며 처음부터 욕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왜 나에게 그렇게 대하는지 어리둥절했는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당시 자신이 붙잡혀 온 여학생에게 상처도 치료해주고 붕대를 감아줬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여학생이 당신인데 방송에서는 왜 거짓말을 하느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홍 씨는 "나 씨에게 그 여학생에게 어떻게 했었는지 자세하게 물어봤다. 그는 주둔지로 끌려온 여학생의 한 쪽 손이 총알로 관통되어 구멍이 나서 지혈을 해주고 흰 붕대도 감아줬다고 했다. 군인들이 끓인 라면도 같이 먹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그녀의 기억과 다른 내용이다. 마이크로 버스가 총격을 받을 때 그녀는 버스 바닥에서 머리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두 팔과 손으로 최대한 얼굴과 머리 부분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미세 총알 파편이 그녀의 팔과 손에 박혔다. 손에 관통상은 없었다.
그녀는 현재까지도 이 상처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너무 미세한 파편들이 피부를 뚫고 혈액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홍 씨는 "의사가 말하기를 나중에 혹시 혈액투석을 해야될 상항이 오더라도 이 부분 때문에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며 "파편이 팔뿐만 아니라 손가락에도 박혀 오른손 중지는 제대로 구부려 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 씨와 홍 씨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주남마을 마이크로 버스 학살 사건은 5⋅18진상조사위가 발표한 것과 다르게 1건이 아닌 2건이 존재할 수 있다.
최 씨 부대는 오전에 주남마을에서 약 1.5km 떨어진 소태동에 매복해 있으면서 마이크로 버스가 오자 정지 명령을 내린 뒤 집단 총격을 가했고, 이에 남성 2명과 여학생 1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부대원들이 주남마을 주둔지로 데려와 남성 2명은 죽여 암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오후 공교롭게도 마이크로 버스 1대가 소태동에서 주남마을로 다가서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매복해 있던 공수부대가 정지 명령을 내리고 집단 총격을 한 후에 부상자인 남성 2명과 여학생 1명을 주둔지로 끌고갔다. 차이가 있다면 홍 씨가 탄 버스에는 무전기가 있었다는 점일 수 있다.
홍 씨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배경에 무전기를 꼽았다. 홍 씨는 "마이크로 버스에 무전기로 교신하고 있는 한 아저씨가 있었는데 공수부대에서는 그 무전기로 무슨 말이 오갔는지를 매우 궁금했던 것 같았다. 주둔지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밤중에 끌려간 곳이 나중에 알고 보니 광산경찰서였는데 100일 동안 수사관들이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회상했다.
그녀의 기록에는 광산경찰서에서 41일간 있다가 훈방조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00일이 넘은 것으로 그녀는 기억했다.
홍 씨는 "무전기가 아니었다면 그때 다른 사람과 같이 죽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린 여학생이라고 살려줄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전기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를 애타게 찾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조사를 받을 때 실제 전두환과 노태우도 만났다고 증언했다. 홍 씨는 "그날도 똑같이 조사를 받으러 가는데 장소가 평소와 달랐다. 거기서 만났던 사람은 매우 높은 계급처럼 행동했는데 한 명은 일반 군복과 모자를 썼고 나중에 온 사람은 얼룩무늬 군복에 베레모를 썼다. 광산서 유치장에 돌아와 저녁 뉴스를 보는데 조사실에서 봤던 사람이 나와 신기해서 옆 사람에게 '저 사람들 오늘 만났다'고 했더니 전두환과 노태우라고 말해줘서 놀랐다"고 말했다.
학살 현장에서 유일한 생존자라고 1988년 5⋅18청문회에도 나왔지만 그녀에게는 씻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가 이미 온몸에 파고 들다.
44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진실'뿐이었다. 조사위는 그녀의 시간인 '오후'를 인정하지 않았다. 큰 충격으로 인해 시간대를 착각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녀는 이 부분을 아직도 억울해하고 있다.
홍 씨는 "많은 증언들이 나오고 있는데 조사위는 더 조사를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내 기억이 왜곡되었다고만 해서 화병이 났다. 내가 너무 억울해하니까 조사위에서 '홍금숙 씨는 주남마을 학살사건을 오전이라고 주장한다'는 글 한 줄 넣어주겠다고 해서 너무 속상했다"고 말했다.
그녀의 진실을 향한 여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그 길이 너무 요원해 보이는 것은 결코 흘러간 세월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5‧18민주화운동이 어느덧 44년이 흘렀다. 누군가는 또 5⋅18이냐고 말하고 누군가는 이제 그만했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그날의 진실은 아직도 묘연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왜곡되고 변형되기도 한다지만 그날 참혹한 시간과 장소에 있었던 증인들은 아직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에 목메어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실체적 진실을 감추려는 사람들은 아직도 진실을 드러내기 두려워한다.
진실을 위해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 4년간 조사해 올해 초 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조사의 적격성에 의문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5⋅18은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역사이고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연구해야 할 숙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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