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안동=이민 기자] "아, 폐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까. (중략) 보옥과 보기는 폐하께서 사사로이 가진 것이 아니고 땅과 백성 한 명도 폐하의 사사로운 물건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어찌 독단으로 주고받기를 필부필부가 밭과 농산물을 매매하는 것처럼 하실 수 있겠습니까?"
1910년 8월 척암 김도화가 한일병합의 소식을 듣고 고종에게 ‘합병하지 말 것을 청하는 상소’ 내용 중 일부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척암 김도화(1825~1912)는 국운이 기울던 시기에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거한 대표적인 유학자자 문장가였다.
그는 정재 류치명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퇴계학맥을 계승한 위정척사 계열의 학자였지만 다른 유학자들과는 달리 망국의 책임을 국왕에게 단호하게 다그쳐 물은 기개의 학자였다.
◇ 한일병합, 국왕에게 책임을 묻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두 달후에는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이에 격분해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유생 중심의 안동지역 의병 봉기 중심에는 김도화가 있었다. 1896년 1월 안동의진 1대 의병장으로 추대된 권세연이 사퇴하자 72세의 김도화가 2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진이 2차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김도화는 강력히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리며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이후에도 수차례 상소문을 통해 국권 회복과 일제 침략을 규탄했으며 대문장가답게 많은 문장을 남겼다.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김도화는 ‘통곡사慟哭詞’를 읊었으며, "폐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까"라는 강한 논조로 고종을 매섭게 질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집 앞에는 ‘합방을 크게 반대하는 집(合邦大反對之家)’의 현판을 붙이고, 스스로 가택연금 생활을 단행하면서 1912년 88세의 생을 마칠 때까지 일제의 지독한 감시를 받았다.
◇ 척암 김도화의 학문, 애국 활동
군주제 국가에서 국왕보다도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한 글들이 담긴 그의 문집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간행됐다. 그러나 이 문집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시문과 상소문, 격문 등의 글들은 수록하지 못하다가 광복 후인 1947년에 별집 2책으로 간행됐다.
척암 김도화의 비분강개한 정서를 담은 많은 시와 서간, 상소문 등이 수록된 문집 55권 29책은 한국국학진흥원이 국역을 완료하고 올해 E-Book 형태로 발간됐다.
한국국학진흥원 한문교육원이 양성한 청년번역가 20명이 연구지도 교수 8명의 도움을 받아 3년간 번역을 진행하고, 이후 국학 전공 청년 10명이 청년인턴십으로 참여해 1년간 편집과 교정을 진행했다. 4년이 소요되었으며, 원고지 2만2000매 분량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오는 22일 오후 2시부터 한국국학진흥원 대강당에서 ‘척암 김도화(1825~1912)의 학문과 애국 활동’의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국역 성과물을 바탕으로 최영성 교수(한국전통문화대)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이규필 교수(경북대), 정하정 교수(계명대), 한준호 박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교수(안동대)가 주제발표자로 나서 김도화의 생애와 학문, 애국 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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