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①] 쉰 넘어 알았다…빨치산 전에 이웃·친구였던 아버지


‘빨치산의 딸’ 이후 32년 만의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그의 첫 장편 빨치산의 딸(1990)의 아버지와 동일인이다. “아버지가 활동했던 백아산의 아, 어머니가 활동했던 지리산의 리,를 딴” 소설 화자 ‘아리’의 이름 역시 ‘지’리산과 백‘아’산에서 가져온 작가 이름의 변형이다. /지리산 =김도우 기자

정지아 작가가 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보고 싶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쓴 책이다.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느꼈다. 사랑은 숨겨지지 않는다. 누구들처럼 소설을 읽고 웃고 운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사실 ‘빨치산의 딸’은 대학 시절 읽었다. 그 때 여운이 30년이 넘어도 남았다. 정지아가 다시 책을 냈다고 해 지리산이 보이는 구례까지 한숨에 달려갔다. 정지아는 아버지에게 받은 사랑을 어머니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끼니마다 밥을 지어내고, 지리산 능선이 보이는 곳에 엄마와 단짝 친구처럼 살고 있다. 그에 말처럼 "쉰 넘어서야 깨달았다. 신이 나를 젊은 날로 돌려 보내준다 해도 나는 거부하겠다. 오만했던 청춘의 부끄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작가를 만나며 배척과 갈등의 말, 금기어로 여겨저온 ‘빨갱이’라는 단어는 유령 같은 것이다. 정지아 작가 아버지 故정운창씨는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조직부부장, 어머니 이옥남씨는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다. 정지아 작가를 만나는 날 정재욱 지리산 사람들 운영위원이 동행했다. 정재욱 운영위원이 작가와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기자는 그 내용을 3회에 걸쳐 정리한다.<편집자주>

[더팩트 | 지리산=김도우 기자]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나이들 수록 잘 산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오만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실수 투성 이었다"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정지아 작가(57·여)는 지리산 능선이 보이는 구례에 산다.

구례에 살면서 부모님의 지인들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것이 변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도 그런 이야기다.

소소하면서도 감동 있는 그래서 깊이 공감하는 내용들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70∼90대 부모님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사실과 픽션(fiction)을 적절하게 그린 한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다.

책은 사랑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책 내면은 투박하지만 깊은 사랑을 말하고 있다.

작가는 "아버지가 2008년 돌아가신 뒤 빨치산이 아닌 누군가의 형, 동생, 이웃으로서 아버지의 삶은 어땠을지 쭉 생각해왔던 것 같다"며 "아버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아닌 휴머니스트였다"고 말했다.

정지아 작가는 전남 구례 지리산 능선이 보이는 한적한 곳에 어머니와 함께산다. 가는 길, 눈에 보이는 곳이 모두 해방이고 자유다. /지리산 =김도우 기자

32년 만에 낸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에서 다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남로당 출신 부모의 삶을 기록한 ‘빨치산의 딸’로 1990년 문단에 등장한 정 작가는 이번엔 결이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의 삶에 시선을 맞췄다.

지난 23일 구례 간전면 백운산 자락에서 만난 그는 "‘빨치산의 딸’이 부모에게 감정을 이입해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옮긴 실록이었다면,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동네 이웃이던 아버지의 삶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이 소설은 작가가 홀로 된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자 고향인 전남 구례로 내려오며 비롯된다.

그는 "구례로 내려오지 않았다면 못 썼을 것 같다"며 "아버지와 연을 맺은 분들 속에 살다 보니, 그 연이 제게 이어져 아버지를 조금 더 가깝게, 새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첫 문장은 오래전에 써뒀다고 한다.내용은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3일간의 이야기다.

화자인 딸 아리는 아버지의 기억을 촘촘히 떠올리고, 빈소를 찾은 친척과 이웃 등이 들려준 일화를 통해 아버지의 다른 얼굴과 마주한다.

소설 속 아버지는 평생을 사회주의자이자 유물론자로 살았다.아버지는 오랜 옥고에 생활력이 없으면서도 먼 친척 보증을 서고, 자기 집 농사를 제쳐두고 남 일에 앞장섰다.

그래서 어머니의 핀잔을 들을 때면 아버지는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겄냐"였다.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이야기 하며 맘껏 말하고, 웃고, 떠들고 함께 했다. 오른쪽은 정재욱 지리산 사람들 운영위원이다./지리산 =김도우 기자

작가가 생각하기에 아버지는 "뼛속까지 사회주의자" "뼛속까지 유물론자"였다.

고지식할 정도로 진지하고 반듯한 아버지의 언행은 그러나 세속의 기준으로 보자면 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될 뿐이다.

가령 차를 놓쳐 겨울밤에 한뎃잠을 자게 된 낯선 방물장수를 데려와 딸의 방에서 재우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아내를 아버지는 이렇게 꾸짖는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위해 목숨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빨치산 투쟁 시절은 물론 마지막으로 옥에서 나온 뒤로도 수십 년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아버지에게 혁명과 민중은 여전히 현재형의 가치요 목표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꽉 막힌 이념과 목적의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장례가 진행되는 사흘 동안 빈소에는 온갖 신분과 이력을 지닌 이들이 조문을 오는데, 그 이념의 스펙트럼인즉 가히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좌에서 우까지 너른 폭을 지닌다.

아버지에게는 이념보다 사람이 우선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왜 구례에서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구례에는 아빠를 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도, 자신이 적으로 알았던 사람도, 함께 산에 올랐다가 죽은 동지의 가족도 모두 살고 있는데. 나 같으면 구례에 살기 힘들 텐데. 자신을 모르는 곳에 가서 살 텐데….구례에서 사람들, 특히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빨치산이 아닌 한 아버지이자 인간 정운창이 자신에게 걸어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 작가는 고향 구례에 내려와 구순이 넘은 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집에는 고양이 3마리, 개 1마리와 같이 지낸다. 유일한 친구이다./지리산 =김도우 기자

아, 아버지는 구례를 떠날 수 없었구나.

구례는 아버지가 초등학교를 다닌 곳이었고, 철도원을 했던 직장이었으며, 가족과 친구, 이웃이 사는 생활 공간이었다.

구례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빨치산이기 전에 한 명의 자식 운창이였고, 초등학교 동창 운창이였고, 멋진 옆집 청년 운창군이었으며, 멋쟁이 남자 운창씨였다.

서서히 깨달았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단지 이데올로기로만 보지 않는다는 걸, 이데올로기란 사람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자신이야말로 아버지를 잘못 생각해 왔다는 걸. 나만 아버지를 빨치산에 혁명가로만 가둬뒀구나. 아버지로, 남편으로, 남자로, 그리하여 온전한 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생각이나 깨달음은 삼년 전인 2008년 5월, 기묘하게 각인됐던 아버지의 장례식 풍경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한쪽에선 옛 빨치산 동료들이 숭고한 민족 통일을 얘기하고 있고, 다른 쪽에선 우파 성향의 고향 친구가 제비가 먹이를 물어오듯 조문객을 데려오고, 빨갱이 새끼 잘 죽었다! 베트남전쟁에서 다리를 잃은 나이 지긋한 남성은 식장 입구에서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리고….

한국 사회의 압축판 같았던 장례식 풍경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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