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화엄(華嚴)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있어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기에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불교 사상이다.
화엄사 오르는 길은 초록의 숲에 색색의 여름 꽃이 보석처럼 박혀 년 중 가장 빛나는 절기인 5월의 장관을 완벽한 조화로 뽐내고 있었다. ‘그럼 이게 화엄인가?’ 라는 턱없는 상상을 하며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섰다.
<더팩트>가 오는 8일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4일 대한불교 조계종 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덕문 주지스님을 만나 삶의 지혜를 구했다. 스님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마음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어려운 시대"라며 자비의 정신을 당부했다.
◆다음은 덕문 스님과의 일문 일답.
-범인들이 시도할 수 없는 엄중한 결단이기에 세인들은 스님들의 출가에 얽힌 얘기를 궁금해 한다. 혹여 들려주실 말씀이 있다면?
전라남도 강진의 바닷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마을 인근에 절 골이라는 동네가 있었고 그 뒤편에 고성사(高聲寺)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어머님이 독실한 불자이셔서 매월 초삼일이면 나와 함께 암자를 찾았다.
늘 어두운 새벽에 길을 나섰기 때문에 나는 과일 바구니 같은 것을 들고 손전등을 비추며 어머님이 안전하게 밤길을 가실 수 있도록 앞장을 섰다. 절을 찾는 이런 산행을 매달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처님과 가까워졌다.
중학교까지를 고향에서 마치고 광주의 석산고등학교에 유학을 오게 됐다. 철이 늦게 들었던지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한 줄을 모르고 살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하숙비를 타기 위해 집에 갔을 때 일이다. 옆방에서 두 분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듣게 됐다. 돈이 없는데 나를 어떻게 대학을 보내야 할지 이런저런 궁리들로 걱정을 나누고 계셨다. 출가의 마음은 아마 그때 싹이 텄을 것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석산고등학교에는 송광사의 광주 포교당인 ‘원각사’ 불교학생회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과 친구로 지내며 절에 다니고 스님들과 대화도 자주 나누면서 출가를 결심하게 됐다.
출가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다. 친구들에게 송광사로 출가를 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버스 터미널에 왔는데 송광사 가는 버스가 15분 전에 떠나고 없었다. 다음 차는 화엄사 가는 버스 였다. 터미널에 있던 관광지도를 보니 송광사와 화엄사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화엄사 갔다 다시 송광사로 가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화엄사행 버스를 탔다. 그렇게 15분간의 우연한 차이로 송광사가 아닌 화엄사와 인연을 맺게 됐다.
화엄사에 가니 동원 큰 스님이 열반하신지 며칠 안됐고 그 뒤를 이으신 종원 큰스님이 나를 보자마자 ‘중 노릇 잘하겠다’ 하시더니 다음날 바로 머리를 깎아주셨다. 그렇게 눌러앉아 행자생활을 시작했다.
-불교중앙박물관장,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을 지내시는 등 불교문화에 남다른 조예와 관심을 갖고 계신 걸로 알고 있다. 불교문화는 한국문화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한국 불교의 역사는 1,700년에 이른다. 삼국이 나라를 형성하자마자 첫 번째 받아들인 정식종교가 불교이다. 조선의 경우를 빼놓고는 고려시대까지 1,200여년 동안 불교는 우리 민족문화의 근간이자 정신적인 뿌리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통치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유교를 숭상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불교를 공부하고 종교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심취했다. 이렇듯 불교는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이자 뿌리였다.
우리 문화재는 크게 궁궐 문화재와 불교문화재로 나뉘어 진다. 이 중 불교 문화재는 가장 오래되고 정통성있는 문화재이다. 다량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도 국민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 역할을 해왔고 정신문화의 뿌리 역할을 해왔다.
-숱한 갈등으로 세상이 어지럽다. 갈등이 빚은 다툼으로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갈등을 해소하는 근원적인 지혜를 구한다면?
화엄사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근본사찰이다. 화엄경은 여러 가지 불교사상을 담고 있지만 그 중 핵심적인 가르침은 ‘일즉일체 다즉일 (一卽一切多卽一)’, 곧 한 개 하나가 전부이기도 하고 전부가 하나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세계인들이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세계 일화’, 즉 세계가 동일체라는 생각으로 인류애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는 말은 대승불교 경전인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얘기다. 한 가지 한 가지를 소중히 여겼을 때 전부가 소중해진다.
전부가 결국 하나라는 근본 생각을 벗어났을 때 분쟁이 발생하고 갈등이 빚어진다. 세계는 다 한 국민, 한 마음, 한 세상이라 생각하면 분쟁이 빚어질 리 없다. 더불어 살아야 하고 서로 의지하고 공유하면 분쟁은 설자리가 없다.
한 개를 더 갖기 위해 서로를 짓밟아야 하고 딛고 일어나야 하고, 다양한 색깔과 언어와 문화, 종교가 결국 서로 하나라는 생각을 갖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증폭된다. 부처님은 이런 세상을 사바세계라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 방법이 없는 것인가? 한발을 빼며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서로 나누는 데서 방법이 찾아진다. 사찰 통행료 문제로 절 밖 사람들과 갈등이 빚어졌을 때, 국민이 싫어하고 군민이 싫어하면 한 발 물러서서 우리가 조금 가난해지면 된다는 생각으로 갈등을 풀었다.
현재 사찰 관람료 문제도 분쟁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화엄사 주지 5년을 소임하면서 관람객과 한 번도 부딪힌 적이 없다. 문화재를 관리하고 보존하기 위해선 최소 사람 수를 제한할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 관람료를 지불하고, 유지관리를 하기 위한 방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문화재를 물려주기 위해선 유산 보존의 측면도 중요하지 않겠는가. 갈등이 아닌 인식 차이, 시각 차이의 문재이기에 갈등이 있다면 서로 한발 물러서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풀어야 한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의 입장에서 국보 문화재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재의 보고인 사찰은 재정적인 측면이나 환경적인 측면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주지를 맡고 계시는 화엄사는 한국 불교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화엄사 보제루(普濟樓)에 걸린 현판이 화장(華藏)이다. 화장은 ‘화엄장 세계’의 준말이다. 항시 많은 사람을 감싸고 포근하게 하기 위한 공간이라는 생각을 늘 한다. 이런 측면에서 화엄사가 가진 한국불교의 위치를 따진다면, 국민과 불자와 국민들에게 불교를 보여주는 관점과 인식에서 중간자적인 역할, 즉 화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스님들이 대부분 젊잔하고 여성스러우며 학문적이며 지적이듯이, 화엄사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사찰이다. 지리산은 큰 산이고 건물도 크다. 이런 생태 환경을 지닌 화엄사는 선(禪)적인 측면이 강하고 이런 점에서 저하고도 잘 맞는 사찰인 것 같다.
-한국불교가 성찰해야 할 대목이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한국불교가 국민들에게 얼마만큼 신뢰를 받고 있느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세인들이 하지 못한 것을 스님들은 한발 앞서가서 공부해 이끌어주는 정신적인 스승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기본 틀을 지켜가야 한다. 이 틀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 틀을 벗어나면 질타하게 되고 야단치게 되고 실망하게 된다.
한국불교가 숙고해야 할 대목은 이런 부분일 것이다. 스스로를 갈고 닦는 선방이 거의 수백군데 선원에 마련되고, 수천명의 스님들이 안거 기간 동안에 정진을 한다. 끊임없이 정진하는 스님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판보다 훨신 더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과연 한국불교를 얼마나 신뢰하느냐는 문제를 생각할 때 사회적으로 보여 지는 시각, 이를테면 승가의 입장에서 보여주는 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위적인 면에서 정갈하고, 질서를 잘 지켜야하고, 계율적인 면에서 청결해야 하고 많은 면에서 국민이 불교를 바라보는 기대치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또한 국민들과 늘 공감대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 2022년을 살아가는 당대의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발발했고, 코로나 팬데믹 이후 3년 동안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우리가 서로 나누고 배려하는 마음을 얼마나 보여주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 가장 큰 마음이며, 이 마음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위안과 큰 힘이 되서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주게 된다.
2022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모든 국민들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자비사상’일 것이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할 줄 아는 마음을 간절하게 가져야 한다. 우리보다 좀 더 어렵고 힘든 분들, 또 우리보다 잘살고 지위가 높다 하더라도 마음이 힘든 분들에게 서로 위로를 주고 손을 내미는 자비의 마음을 모두가 가졌으면 하는 합장을 드린다.
인터뷰 말미에 조계종 차기 총무원장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일을 물었더니 "안정과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이 종단을 이끌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그런 면에서 적임자가 아니시냐는 질문에는 "선거를 통해 불교 지도자를 뽑는 곳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말하며 "스님들이 모여 추대하는 방식으로 총무원장이 선임됐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개인적인 의견을 밝혔다.
큰 스님에게 구한 지혜 탓일까? 가던 길보다 돌아오는 길은 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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