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여론조사가 신(神)이다. 제17대 대선에 나섰던 정동영 후보가 아무리 안간 힘을 써도 선거 초반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판세에 낙담해 기자들에게 푸념한 말이다.
여론조사에 간절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이 절절함은 비단 정 후보의 경우만은 아닐 것이다. 선거에 나선 모든 후보들에게 작동되는 끔찍한 시련이다. 여론의 흐름을 보여주는 게 여론조사지만, 여론의 흐름을 주도하며 후보의 순위를 고착시키기도 하는 현실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를 후보 당내 경선의 기본 틀로 삼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큰 벽에 부딪혔다. 안심번호 추출방식을 악용한 여론조작 의혹이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더팩트>가 밀착 취재한 결과 전라북도 완주, 광주 동구, 그리고 최근에는 전라남도 특정지역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안심번호 추출방식의 허점을 악용해 여론조사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파문이 일고 있다.
안심번호 추출방식의 여론조사가 결코 ‘안심할 수 없다는’ 조작 의혹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는 것은 안심번호를 추출하는 방식의 구조적 맹점 때문이다. 선관위에 제공되는 통신 3사의 안심번호는 지역별 점유율에 따라 SKT 50%, LGU+ 30%, KT 20% 비율로 제공된다.
예상할 수 있는 조작 수법은 간단하다. 안심번호 추출이 통신사의 요금 청구서 수령 주소지를 기초 자료로 삼기 때문이다. 고객이 요금 청구서를 받을 주소지만 변경하면 통신사는 그 고객을 청구서 수령지역 거주자로 간주하고 선관위에 제공하는 안심번호에 포함시키기 때문이다.
요금 청구 주소지 변경절차도 간단하다. 해당 통신사에 전화를 하거나 앱(APP)을 이용해 손쉽게 바꿀 수 있다. 특히 유권자 수가 적은 군 단위의 경우 안심번호 추출방식의 허점을 악용한 주소지 조작은 주민 민심왜곡에 심각한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안심번호를 활용하는 무선 여론조사의 응답률이 10%대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유권자 2만명의 군 단위의 경우 5천명에게 전화를 걸어 응답한 500명을 표준으로 삼는다면 100명만 동원해도 이 중 상당수가 전화를 받게 되고, 이들이 모두 특정 후보 지지에 응답한다면 큰 폭의 지지율 상승효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요금 청구 주소지 변경을 활용한 여론조사 조작 의혹의 도마 위에 올라있는 후보군은 주로 지역의 일반적인 여론과는 상반되게 상식 밖의 지지율을 기록한 후보, 또는 단기간에 지지율이 급상승한 후보들이다. 이같은 측면에서 최근에 실시된 전남 강진군수 후보 대상 여론조사에도 의혹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강진군수 모 예비후보 캠프에서 활동하는 A씨는 "두 달 전 여론조사 지지율에 비해 최근 조사에서 두 자리 수 포인트 이상 급등한 후보의 사례가 있다"고 밝히며 "(이 때문에) 주민들 대다수가 의외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광주에 연구소를 둔 여론조사기관 대표 B씨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큰 이슈나 사건사고 없이 단기간에 지지율이 두 자리 수 이상 급변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고 전제하며 "단기간에 급변한 케이스는 어떤 형태로든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서 B씨는 "일정 선거구로 단기간에 통신료 납부 주소지 변경이 이뤄진 사례를 안심번호 추출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일정 기간 이상 납부 주소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무선전화 번호만을 대상으로 삼는 등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여론조사 ‘샘플 오염’ 의혹이 호남 여러 곳에서 잇따라 제기되면서 여론조사 조작 논란은 민주당 경선의 ‘뇌관’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민주당 경선이 곧 당선이 되는 정치 지형에서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안심번호 추출 방식의 맹점을 악용해 정치브로커들이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같은 여론조사 조작방법은 이미 예비후보자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상태여서 조작 사례가 더욱 확산될 우려도 크다.
민주당 전남 도당 관계자 C씨는 "안심번호 추출 방식을 악용한 여론조작 의혹 제기는 이미 다수의 선거구에서 이슈화 된 상황이다"고 밝히며 "본 경선 여론조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같은 의혹을 불식시킬 수 있는 중앙당의 특별한 제도개선 조치가 불가피해졌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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