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팩트ㅣ대구=이성덕 기자] 102년 전 현재의 대구시 중구 오토바이 골목 입구에서 독립만세운동 첫 순간이 기록됐다.
일본 경찰과 헌병의 경계가 삼엄했던 상황 속에서도 천도교·개신교·불교계 대표 인사들 구축으로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정치 조직과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3·1운동은 서울 인사동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시작됐다. 서울에서 내려온 이갑성은 이만집 목사, 김태련 조사 등을 만나 대구에서도 궐기하기를 권하면서 독립선언서 200매를 전달하고 갔다.
일본 경찰과 헌병의 경계가 삼엄했던 상황 속에서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 그리고 계성학교 학생들, 신명여학교 학생들, 대구성경학교 학생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학생들, 대구 농림학교(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 학생들이 계획하고 준비했다.
김태련은 본인의 자택에서 등사기로 독립선언서 200장을 인쇄하고 태극기 40본을 준비했다. 원래는 남산정교회 지하실에서 준비하려 했으나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장소를 변경했어야 했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이들은 자신이 밟고 있는 땅에서 비밀스럽게 조직적으로 준비했다.
대구 만세 운동의 책임자 이만집을 비롯해 행동대원 김태련 등 함께 모여 1919년 3월 8일 오후 1시 큰장(서문밖 시장, 서문시장)에서 최종적으로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계성학교 김영서 등 교사들과 학생 김재범·김삼도·이승욱·허성도 등은 아담스관 지하실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박태현·박성용·이영식 등 여러 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태극기를 준비하기로 했다. 계성학교 이영식 학생은 독립선언서 일부를 자전거에 싣고 어두운 밤 경북 칠곡군 인동(지금의 경북 구미시 임오동)까지 전달했다.
3월 8일 계성학교 학생들을 포함해 수업을 마치고 이들은 대구동산(지금의 청라언덕)을 지나 약속장소로 들어왔다.
이만집 목사는 품속에 품어 온 독립선언문을 꺼내 낭독하려 했으나 만세운동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안 일본경찰이 나타나 방해로 그는 공약 3장만 겨우 낭독했다.
이만집 목사는 소달구지 위에서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립을 할 수 있는 때다. 각자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세를 부릅시다"하며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선창했다.
1000여명의 군중들은 대형 태극기 깃대를 치켜들며 일제 경찰의 방해를 물리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 행렬은 대구중부경찰서-중구 종로(신발골목, 약전골목)-대구백화점 부근까지 전진했다.
이 곳에는 일제 군경이 무장한 채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행렬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일제 군경은 이들을 마구 짓밟고 두들겨 패면서 탄압했다.
이만집과 김태련 등 157명이 일제 군경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고 이 중 71명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18일 이만집은 징역 3년, 김태련은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았다.
광복회 대구지부 노수문 지부장은 <더팩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부러워하는 발전을 이루고 선진국가로 진입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애국선열들의 기백과 정신을 이어받아 모두가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대구는 전국적으로 봐도 많은 독립운동의 업적과 인물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기에 대구 독립운동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대구에 학생독립운동 참여했던 유공자는 총 두 분 살아계신다. 이들 모두 고령층이라 생전에 기록하는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